
유몽인이 수경당(水鏡堂)을 제재로 누정기를 썼다. 거울처럼 맑은 물을 뜻하는 수경은 매우 맑고 깨끗한 인품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수경당의 주인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을 법도 한데, 유몽인은 그저 풍경 묘사만으로 작품 전체를 채웠다. 한강에 배 띄우고 앉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놀다 보니 취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꿈속처럼 펼쳐진다고 하면서,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양편 언덕이 거꾸로 걸려 있고 산봉우리가 아래를 향했다. 사람도 소와 말도 모두 물구나무서서 걸어가며, 새는 배를 위로 젖히고 날아간다. 정자 하나가 있는데 섬돌이 위에, 기와지붕은 아래에 있으며, 현판의 글씨 역시 뒤집혀 있다. 그런데 가벼운 바람이 문득 불어오자 풍경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공적 관계인 남들도 지적하지 않는데 사적으로 가까운 아버지만 왜 이렇게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사적인 관계니까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기를 바라는 거란다. 참으로 슬프구나. 세상에 가까운 사람이 없어지면 경계해줄 사람도 없게 될 거다. 내가 죽은 이후에야 너는 내 말을 알게 되겠구나.” 아들은 나가서 투덜거렸다. “늙은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날 하지 말라고만 한다니까?” 15세기 문인 강희맹이 자신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 형식에 담아 우회적으로 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야기 속의 아들이 범한 잘못은 시장의 간이 오줌통에 상습적으로 소변을 본 일이었다. 오가는 상인들이 급할 때 사용하는 시설이어서 양반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들은 오히려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런 겁쟁이들!..

한글은 표음문자다. 글자의 모양 자체에는 어떤 의미나 형상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한국어 화자로서 글자만 봐도 무언가 강렬하게 떠오르게 하는 글자들이 있다. ‘꽃’이라는 글자가 대표적이다. 굳이 멋진 캘리그래피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꽃은 꽃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 거기 그 나무가 있었던가 싶었던 자리 여기저기에서 거짓말처럼 툭툭 망울을 터뜨리는 꽃을 발견하며 새삼 생명의 기쁨을 느끼는 계절이다. ‘기쁨’이라는 글자도 그렇다. 보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게 한다. 기쁘다는 뜻의 한자 열(悅)은 태(兌)에서 왔다. 입 모양인 ‘口’ 위에 찍은 ‘八’이 웃을 때 잡히는 입주름이고 아래의 ‘’은 사람을 뜻한다. 웃고 있는 사람의 입 모양을 강조한 글자다. 첫 장을 공자는 기쁨으로 시작했다. 배우고 수시로 익..

“이후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 및 그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 제1관의 첫 문장이다. ‘백리새천덕’은 ‘프레지던트’의 중국어 음차이다. 우두머리 백(伯), 다스릴 리(理)에 옥새와 하늘의 덕을 조합하여 의미도 담았다. 그 외에 두인, 방장 등이 번역어로 혼용되다가 중국에서는 ‘총통’으로 일반화되었다. ‘대통령’은 1850년대 일본 문헌에서부터 보인다. 기존 한자어 통령을 활용한 신조어다. 조선의 이헌영은 에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면서 “국왕을 이른다”는 설명을 붙였다. 대통령을 임금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오늘날 공화(共和)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 임금이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우두머리가 없을 수 없으니 한 사람을..

“봄 산에 뜨거운 불길이 뇌성벽력 요동치고, 하늘로 치솟는 붉은 화염에 은하마저 말랐어라. 허다한 가시덤불이야 태워 버려도 그만이지만, 고고한 소나무 백 년 가지가 너무도 애석하도다.” 영조 때 문인 송명흠이 산불을 보며 읊은 시이다. 요 며칠, 울진의 소나무들이 눈에 밟힌다. 새파란 바다 빛에 어우러져 말쑥하고 늠름하게 서 있던 그 푸른 소나무들. 뉴스를 통해 보는데도 바지직바지직 그 입 꽉 다문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화재를 마귀에 비유한 화마(火魔)라는 표현은 참으로 실감 나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이 세계의 괴멸을 겁화(劫火)라는 엄청난 불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불은 일단 번지고 나면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곤강(崑岡)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나 모조리 타 버린다”는 ..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 발음이 안 좋거나 촌스럽게 느껴져서, 혹은 사주성명학을 근거로 운명을 바꿔 보려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여러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명을 단행하는 분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개명의 이유 중에 비교적 공감이 쉽게 가는 것은, 널리 알려진 흉악범과 이름이 같은 경우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명(名)이 따로 있지만 평상시에는 늘 자(字)로 불리던 시절, 조재우라는 인물은 성년이 되면서 회지(會之)라는 자를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송나라 때 간신으로 유명한 진회의 자가 회지였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스물세 살의 젊은이로서 평생 간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조재우는 집안 어른인 조귀명을 찾아 상의했다. 그런데..

“위언은 산림에서 나오고, 높은 행적 책 속엔 드무네. 산인은 원래 강직하니 후학이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어우 유몽인이 남명 조식을 기리며 쓴 시이다. 여기서 위언이란 조식이 올린 상소문에서 당시 수렴청정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문정왕후를 가리켜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를 본 명종이 격노하여 불경죄로 처벌하려 한 것도 당연하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위언과 위행을 하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위행은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위언(危言)과 위행(危行)은 위험을 무릅쓰고 준엄하게 하는 말과 행동이다. 의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설득시키지 못할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

“누가 뭐래도 숙부님은 오직 백성을 위하는 분입니다. 불가피하게 그 앞길을 막는 자들을 처단하려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불가피함을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느니라. 그건 힘으로 의를 짓밟는 자들의 변명이다. 만일 네가 큰일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작고 힘없는 자라면 어떻겠느냐.” 드라마 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변호하자 정몽주가 답하는 장면이다. 불가피한 일을 감행하지 않고는 현실의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 이방원은 결국 ‘큰일’을 위해 스승 정몽주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훗날 정도전마저 제거해 버리고 왕위에 오른다. 부친을 거역하고 스승과 친지들을 가차 없이 죽인 승부사 이방원. 드라마의 서두는 그가 스스로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정변, 숙청을 감행하는 괴물이 된 것이 결국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