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생 백 년 동안/ 쉰아홉 번째 만나는 봄/ 해와 달은 날아가는 두 마리 새/ 하늘과 땅 사이엔 병든 이 한 몸/ 소반의 보드라운 나물은 푸른 빛 돌아왔고/ 동이의 진한 막걸리 하얗게 발효됐네/ 철 따라 변하는 만물 참으로 놀라워라/ 사람의 마음도 새로워짐을 기뻐하네.” 조선 문인 서거정은 봄나물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새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르는데, 매년 돌아오는 봄은 놀랍도록 새롭기만 하다. 송나라 학자 주희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술 빚는 일에 비유하였다. 발효가 미세하게 시작되어 온기가 도는 순간이 인(仁)이고, 왕성한 발효작용으로 매우 뜨거워지는 때가 예(禮)이며, 술이 완전히 익으면 의(義), 물처럼 안정을 찾으면 지(智)와 같게 된다. 하루로 비유하자면 청명한 새벽이 ..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관중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후임자를 묻는 환공에게 관중은 군주의 마음을 사기 위해 반인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역아, 개방, 수조를 멀리하라는 경계만 남겼다. 관중이 죽은 뒤 환공은 이들을 가까이 하였고 결국 이들의 전횡으로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공자도 관중 덕분에 중화 문명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관중이 세운 공은 컸다. 하지만 후대의 문장가 소순은 제나라가 혼란에 빠진 것이 관중 탓이라고 하였다. 관중이 훌륭한 후임자를 세워 놓았다면 간신들이 아무 짓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재 추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논의로 회자된다. 정말 그럴까? 누가 있어서 안 되고 누가 있으면 되는 정치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정치다. 소순보다 훨씬 일찍 ..
조선시대 황해도에 조수(潮水)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밀물과 썰물만 관찰하기를 60년. 그 결과는 책 두 권이었다.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먹고 입을 것을 장만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용한 일에 정신을 다 소모했다며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귀명은 이 사람에게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에 의하면 상고시대의 왕들은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큰 바다보다 작은 하천에 먼저 하였다고 한다. 바다가 어마어마한 크기와 위력을 가지게 된 것은 근원이 되는 작은 샘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당장 눈을 압도하는 바다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그 물이 어디에서 흘러온 것인지는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도 안 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성어인 “어불성설(語不成說)”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리식 한문 표현이다. 말의 내용이 이치나 상식에 맞는지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든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말 자체가 성립되는지를 늘 따지고 그게 납득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경향성이 이런 특정한 언어 표현에 반영되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삶에는 말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심오한 깨달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도 어떤 이유가 있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
한문을 번역하거나 번역서를 많이 읽다 보면,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어휘를 일반인이 의외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전공자라 해도 대부분 한글세대이므로 본인도 처음에는 낯설었을 텐데, 워낙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익숙해져서 다른 어휘로 바꿀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만 되어 있으면 문제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대체할 만한 다른 어휘가 없으니 오히려 낯설더라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휘의 양이 사고의 범위와 깊이를 좌우한다는 생각에서다. ‘기필(期必)하다’는 국어사전 등재 어휘이고 ‘기필코’라는 부사가 사용되고 있어 아주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북송의 학자 정이가 왕에게 올린 상소문 글귀로 유명한 “세속의 논의를 물리치고 대단한 공적..
“이 몸을 이번 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할까(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다음 생을 기약하며 포기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라는 불가의 경구다. 윤회를 믿지 않던 선비들도 나태함을 경계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곤 했다. 김창협은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안정을 취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하는 제자에게 스스로 마음의 주재를 확립하지 않으면 상황에 끌려 다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계하면서, 이 구절에 유념하여 그 고리를 끊도록 권하였다. 조귀명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는 것만 위해 살 수는 없는 일. 이번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고는 생을 걸 만한 ..
예년 같으면 술 약속이 이어질 연말인데 모든 송년모임이 취소되었다. 수도권은 5인 이상 사적 모임 집합금지가 행정명령으로 시행되고 있다. 연말연시 방역을 최대한 강화하려는 특단의 조치로 이해한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반가운 이들과의 자리에 빠지기 어려운 술 이야기로 달래본다. 에 의하면 술은 ‘하늘이 내린 멋진 선물(天之美祿)’이고 ‘온갖 약 가운데 으뜸(百藥之長)’이다. 의 여러 시에서도 노인을 봉양할 때나 친구와 어울릴 때나 꼭 필요한 것이 술이라고 노래했다. ‘근심을 잊게 만드는 물건(忘憂物)’은 도연명이 술에 붙인 별명이다. 위나라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술꾼들이 청주는 성인(聖人), 탁주는 현인(賢人)이라는 은어로 부르며 몰래 마시곤 했다. 당시 서막이 술을 마시다 적발되자 “성인에게 걸려들..
획수 많기로 유명한 한자 가운데 하나가 ‘鬱(울)’이다. 보기에도 빽빽한 이 글자의 뜻은 ‘잔뜩 쌓여서 꽉 막혀 있음’ ‘무성한 모양’ ‘답답함’ 등이다. 원래 갑골문은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숲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엎드린 다른 사람을 짓밟는 모양이었다. 뒤에 두 사람의 모양이 부(缶)와 멱()으로 변형되었고 발음기호 역할을 하던 아래 부분이 더해졌다. 갑골문을 근거로 하면 이 글자의 앞서는 뜻은 울창함이 아니라 억울함이다. 마음의 답답함에 외부의 불공정이 더해지면 억울함이 되고 이게 쌓이면 울화가 된다. 화병이 한국어 발음대로 ‘Hwa-byung’이라는 질병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억울함은 한국 문화의 일부를 이루어 왔다. 최근 출간된 은 전통시대에 여성과 약자만이 아니라 권력을 쥔 왕과 양반에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