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랫집에서 팥죽 쑤었다며 문을 두드려, 주공 뵙다 화들짝 놀라니 꿈이었구나. 땅속에서 우레가 울리니 큰 과일이 뒤집히고, 우물 밑바닥에서 양기가 나와 큰 물레를 돌리네.” 고려시대 문인 이곡이 동짓날 지은 시의 일부이다. 공자는 꿈에 늘 주공을 뵐 정도로 주나라 초기의 바른 도를 회복하고자 염원하였다. 이곡 역시 꿈에 주공을 뵙다가 이웃이 동짓날 팥죽을 보내오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음양의 이치로 보면 온통 음밖에 없는 때이다. 하지만 음이 가장 창성한 바로 그때 양이 아래에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에서는 다섯 개의 음효 아래에 하나의 양효가 있는 복괘(復卦)가 이에 해당하는데, 세 효씩 나누어 보면 땅() 아래에 우레()가 있는 형상이다. ‘큰 과일’ 즉 석과(碩果)는..

주변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선하고 따뜻한데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만 나서면 사나운 사람들뿐이다. 온라인 언론 보도나 각종 사회관계망 매체의 댓글들에는, 직접 만나서는 도저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말들이 넘쳐난다. 약자를 더욱 잔인하게 짓밟고 힘의 논리를 대놓고 옹호하는 말들이 솔직함을 명분으로 마구 던져진다. 대개는 누군가의 가족이고 평범한 사회관계를 지속하는 사람들일 텐데 자신이 괴물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폭언을 일삼는다. 실제보다 과도하게 악한 척을 하는 위악(僞惡)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악이라는 말은 전통시대의 한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일 뿐 현대중국어에도 등재되지 않은 단어다. 선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 위선을 하면 했지 위악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헤..

하나의 질병이 사람들의 삶을 속속들이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 일상의 산물인 언어에도 변화가 오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신조어의 출현이다. 온택트, 집관, 차박 등 영어를 가져오거나 우리말을 축약해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공식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자가격리’ 역시 코로나19 이전에는 못 보던 어휘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니 ‘자가 격리’라고 띄어 써야 맞겠지만 대부분의 국가기관과 언론매체에서 띄어쓰기 없이 사용할 정도로 자가격리는 시민권을 얻은 어휘가 되었다. ‘자가(自家)’라는 어휘가 ‘자기의 집’과 ‘자기 자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자가격리가 주로 ‘자기의 집’에 머물며 이루어지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도 있지만, 자가격리의 자가는 ‘자기 자체’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공자가 주나라 태묘에 가서 쇠로 만든 동상을 보았는데, 그 입이 세 겹으로 꿰매어져 있었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그 동상의 등에 새겨진 글귀다. 말 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남을 그르치는 이들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묵재, 묵와, 묵헌, 묵암, 묵계, 묵옹…. 말없음을 뜻하는 묵(默)을 자신의 호로 삼은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홍계희가 거실 이름을 ‘무언재(無言齋)’라 붙이고 오원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오원은 오래 묵혀 두었다가 이렇게 권면했다. 사람에게 말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는 폐단뿐 아니라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폐단도 크다. 공자가 민자건을 칭찬한 것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절한 때 이치에 맞는 말만 ..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가 오랜 지인인 상득용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축하하는 이유가 이상하다. 상득용이 말에서 떨어진 일을 축하한다는 것이다. 뼈가 어긋나고 인대가 늘어나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채 종일 신음만 내뱉고 있는 이에게 축하 편지라니. 찰과상으로 흉측해진 상득용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지 않았을까? 사리에 어긋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홍길주는 자신이 축하하는 이유를 써내려갔다. 상득용은 무인이다. 말을 자기 몸처럼 다루며 능수능란하게 타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본인도 말 타는 능력만큼은 자부하곤 했다. 홍길주는 바로 이 익숙함이야말로 낭패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말 타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고삐를 부여잡고 안장에 바짝 앉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갔을 테니 크게 떨어질 일이 없..

발을 동동거리며 여러 사람을 만나서 일을 도모하는데 남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 최신의 정보로 탁월한 전략을 세워 추진해 보아도 일의 진행이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삐거덕거린다. 마음이 통해야 감동이 있고 그럴 때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텐데, 어디에서 막힌 것일까. 감동이란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감(感)의 윗부분인 함(咸)은 무기인 술(戌)로 사람을 내리쳐서 죽인다는 뜻이다. 비명을 지르는 입, 혹은 잘려진 머리를 그려놓은 것이 가운데의 구(口)이다. 공개 처형을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느낌’을 주어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고대의 문화에서 비롯되어 ‘느끼다’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함(咸)이 후대에 ‘모두’라는 뜻을 겸하게 되면서 본래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심..

일상 어휘를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는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띠고 바꿀 수 있다. 2011년 대한의사협회에서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개칭하기로 확정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리스어 ‘skhizo(깨짐)’와 ‘phren(마음)’을 합성한 어휘가 ‘schizophrenia’이니, ‘정신분열’로 번역한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의미 영역이 너무 넓고 부정적이어서 사회적 편견을 야기할 수 있다. 환자 및 가족들의 염원에 부응하여 유관 학회를 중심으로 병명개정위원회를 결성, 3년여의 연구와 설문 끝에 결정된 명칭이 조현병이다. ‘조현(調絃)’은 악기의 현을 조율한다는 뜻으로, 마음의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질환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조선 후기의 김조순은 조현병..

중국 고대 주나라의 성왕이 어린 동생 숙우와의 사적인 자리에서 오동나무 잎으로 홀 모양을 만들어 주면서 “이것으로 너를 봉분하노라”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홀은 왕이 제후를 세워 일정한 영토를 맡아 다스리게 할 때 주는 신표다. 숙우는 기뻐하며 국정을 총괄하던 숙부 주공에게 가서 말했다. 주공이 성왕에게 이 일을 묻자 성왕은 그냥 장난삼아 해본 말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주공은 정색을 하고 “왕은 장난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왕이 말을 하면 사관은 기록하고 악공은 노래하고 사대부는 찬미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숙우를 제후로 봉하게 하였다. 에 실린 이야기다. 왕으로서 말을 신중하게 하도록 성왕을 경계하는 한편, 왕의 말이 지니는 절대권위를 세움으로써 통치 기강을 다지고자 한 주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