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상에 쑥국이 올라왔다. 향긋한 쑥 내음이 입맛을 돋운다. 쑥국은 예전부터 가족, 친지와 함께하는 봄나들이 음식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항복은 형제들과 어울리며 즐거웠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 밑에서 묵은 쑥 뿌리 싹트려 할 때면/ 향긋한 쑥국 작은 모임에 봄기운 가득했지”라고 노래했다. 조경은 “부엌 사람 쑥을 캐어 쑥국 끓이니/ 수저 가는 반찬마다 향기롭구나”라며 그 옛날 태평성대의 백성처럼 흥에 겨워 배를 두드린다고 하였다. 화창한 봄날의 행복한 정경이다.그런데 정희득은 쑥국 끓이는 것을 보며 탄식한다. “여러 어르신들 물가에 모이셨고/ 지는 해는 저녁밥 지어라 재촉했지/ 작년 이맘때 즐기던 일 기억에 또렷한데/ 하늘 끝 먼 땅에서 눈물 쏟으며 쑥을 캐네.” 그는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한, 용서를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이 ..
햇볕 받으며 걷다 보니 땀이 차오른다. 얼굴을 덮은 마스크 때문인가 싶었는데, 여전히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경이 온통 코로나19에 가 있어서일까. 3월이 벌써 중순으로 넘어간 것도 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가득 차서 시끌벅적했을 대학 교정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매화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거무튀튀하고 딱딱해 보이는 나무둥치 여기저기에 거짓말처럼 화사하게 꽃잎이 맺혀 있다. 봄이다.퇴계 이황은 임종하던 날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화시만 해도 100여 수를 남긴 퇴계에게, 매화는 그리움을 멈출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찾아가곤 하는 벗이었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정신적 가치를 함께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뜨락을..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질병이 보건을 넘어 인권, 정치, 경제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개인의 두려움은 집단적인 미움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바이러스의 은밀한 공격이 연일 생중계되고, 거기에 더해지는 온갖 말들이 범람한다.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일까.이 상황의 원인은 특정 국가도, 종교도, 정권도 아닌 바이러스다. 우리의 의학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 외에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문적 협의는 지속해야 하겠지만, 그 길의 어디에도 배제와 비난이 필요한 대목은 없다. 은폐를 전략으로 포교하는 종교집단이 확산의 온상이 된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도 병세를 밝히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확진자 증가에 연연하지 ..
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다. 1954년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하여 TV로 옮겨 1982년까지 이어졌고, 2005년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관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리 뽐내도 사랑스럽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라는 제목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정조가 어느 날 역정이 묻어나는 비답을 내렸다. 심낙수가 홍국영, 구윤옥, 송환억 등을 비난하면서 이들이 있어서 치세라고 할 수 없지만 정조가 있으므로 난세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요구한 상소문에 대해서였다. 정조는 심낙수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렇게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어 어지럽게 다투는 행위 때문에 치세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올해 사업이 잘되었다지?”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축하하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 아니니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더욱 간편하게 전할 수 있다. 주는 것 없이 받으라 하고, 받은 것 없어도 기분 좋은 것이 덕담이다.사실 복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복(祝福)과 신(神)의 한자에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기(示)가 공통으로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은 본디 초자연적 존재와 연관된다. 한 해 내내 반복되어 온 일상의 고리를 잠시나마 끊고, 새해에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잘 안되던 일들까지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건네는 말이 덕담..
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마다 많이 들리는 성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새해의 시작을 맞아 운동, 금연, 외국어 공부 등 모처럼 작심한 일들이 며칠 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만 데 대한 후회와 자괴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다.작심삼일은 고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사흘 고기 잡고 이틀 그물 말린다는 뜻의 ‘삼천타어(三天打魚) 양천쇄망(兩天쇄網)’이라는 중국어 표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지 사흘 만에 못 견디고 환속한다는 뜻의 ‘삼일방주(三日坊主)’라는 일본어 표현 등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17세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우리 고유의 성어다.사실 어떤 목적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뜻의 작심(作心)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맘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그믐날 뜨는 해와 설날 뜨는 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구획을 지어 떠들썩하게 의미를 부여해온 데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태를 훌훌 떨쳐버리고 새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6세기 시인 노수신은 연말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지은 시에서 “어지러운 잡념들이 꼬리 물고 일어나니, 가볍게 다스려 조장도 망각도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번잡해지는 마음을 무겁게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안정을 이룰 수 없는 법, 조바심에 일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되 그렇다고 손 놓고 방기해서도 안된다는 맹자의 말을 송구영신의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송구영신의 때에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