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성폭력(rape) 예방 교육을 할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싫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고 어린이 성폭력은 더 비율이 높다(80%). 무엇보다, 압도적인 폭력 상황에서 “분명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효과보다 역효과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죽하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저씨를 쳐다보지 마라.” 아저씨라고 썼지만 가해자는 대개 아빠, 삼촌, 아빠 친구, 오빠, 교사, 의사, 경찰 등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니, 모른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피해자에..
올해 노벨 화학상은 세 명의 영미권 학자에게 돌아갔다. 가장 연장자인 미국 미주리 대학교의 조지 P 스미스(77)의 수상 소감이다. “거의 모든 수상자가 자신이 받는 상은 ‘딱 그때 그곳에 있었기에’(강조는 필자) 활용하게 된 수많은 아이디어와 연구, 전례 위에 쌓인 것임을 알고 있다. 노벨상에 이르는 연구는 매우 적고, 사실상 전부가 이전에 진행됐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수상은 우연(happenstance)이다. 내 연구도 기존의 연구 위에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다.” 대개 이런 말은 겸손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시상식장에서 영화배우들이 “많은 스태프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는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얹었을 뿐이다”라는 소감처럼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타인에게 공을 돌리는, 그런 겸손 말이다. 영화의..
드라마 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
버스 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현재 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시키기도 한다. 임신 중단 합법화, 즉 기존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낙태죄 폐지는 너무 당연하다. 찬반 논의는 ..
몇 년 전까지 4월은 4·3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달이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4·3을 삭제하려 했고,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예전에 5월은 ‘광주’로만 기억되었으나 2016년 이후에는 강남역 사건이 더해졌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애도할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내달, 6월에는 두 명의 중학생이 생각날 것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사건(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넓었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에는 2014년 늦은 봄부터 2017년 여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간의 소설 쓰기가 “넋을 견디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 견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는 것도 힘겨운 지경인데, 죽은 자의 넋을..
정권 교체기마다 골칫거리 중 하나가 교과서 문제였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단일 교과서 제정을 강행, 큰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으로 교과서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월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의 곽상도 의원(자유한국당, 대구 중구·남구)은 작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은·이윤택·오태석씨에게 8억6700만원을 지급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은의 작품을 교과서에 삭제할 생각이 없느냐”며 ‘의기양양’하게 대정부질문에 나섰다. 이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고은 시인의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1개, 고등학교 교과서에 10개 등 총 11개가 실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저작권은 발행사가 갖고 있다”며 교과서 발행사와 삭제 여부를 논의할 것임..
미투 운동에 대한 나의 심정은 복잡하다. 걱정과 분노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물론 지금 미투는 유사 이래, 어느 사회에서도 없었던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혁명이다. 나도 당사자이기 때문에 임전무퇴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미투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여성들이 수시로 겪는 폭력은 당장 대책이 없다. 마음속으로 미투를 외칠 뿐이다. 고은이나 이윤택씨의 경우는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문단, 연극계)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망자(亡者)인 남성도 있고, ‘억울한’ 남성도 있다. 범죄의 성격과 경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사회의 가해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민주당의 정봉주씨와 안희정씨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무너진 ‘적산(敵産)가옥’ 위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긴 항해를 거친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진사퇴를 불러온 몇몇 인사의 경우, ‘진보 지도층’의 생각지 못한 면모를 보았을 뿐, 완벽한 정부는 없다. 특히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가치관이 현 정권의 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사안에 대한 입장은 놀라울 정도다. 세월호, 5·18,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최고 통치자’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알고 있고, 잊을 수 없다. 그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경남도민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3중고를 ‘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