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면 촛불 꺼진다”던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벌금 2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해 20대 총선 당내 경선 당시, 선거구민 9만2000여명에게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이행평가 강원도 3위’라는 허위 사실을 문자메시지로 발송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고 국민참여재판이었는데도, 그는 유죄 판결이 문재인 정부의 탓인 양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내 심경은 김진태씨와 정반대다. 세상이 바뀐 것을 빨리 체감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에겐 정권 교체의 의미가 크겠지만, 평범한 시민에겐 “새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 외엔 큰 변화가 없다. 이 체감의 다름이 ‘난생처음’ 서러운 사람과 언제나 서러웠던 민초들의 차이가 아닐까. 오랫동안 구조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를 합치..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 말은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작년 5월17일, 서울시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이른바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이름도 없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며칠 후 비가 내렸고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절반의 기쁨이었다. 전원일치는 다행이지만 혐의 내용 중 최순실씨 건 외에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일곱 시간’ 행적 논란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전 대통령의 무능과 게으름을 상징한다. 평범한 사람의 불성실도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데,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황당한 본분 망각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불성실은 죄(sin)일까, 범죄(crime)일까. 개념상으로는 죄와 범죄는 차이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는 시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사회관계는 밀접해졌고 도미노 현상은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문제에 대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
나는 지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 시민’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나 역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여성과 남성은 그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합성 그림이 포함된 ‘표창원 의원과 함께하는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 전시회’, ‘곧, BYE! 展’은 철지난 뉴스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인류 5000년 역사를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반복될 이슈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올랭피아’를 베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20일부터 전시되었다가 논란으로 철거된 상태다. 마네는 웬만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 여성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이 그림에 ..
최근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탁월한 선택’에 스스로 감격하고 있는데, 누군가 뒷좌석에서 “나라가 미쳐가니 영화도 미쳤구만, 막장….”이라며 투덜댔다.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집으로 오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미쳐가는 나라”의 풍경이다. 영화가 현실보다 훨씬 덜 ‘미쳤을’ 뿐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는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계약직) 교사인 두 여성의 갈등을 그린다. “○수저” 표현이 진부하지만, 둘은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표한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금수저의 무지와 운명’에 관심이 갔다. 계급 고착 ..
며칠 전 어느 단체의 송년 모임에서 간단한 강의를 했다. 나는 ‘올해 지구촌 뉴스’를 전하면서 “박근혜,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나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박·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국정파탄,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구토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보다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한계와 절망을 느꼈다. 독점한다는 의미의 ‘농단(壟斷)’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최순실씨 일가가 박태환 선수 협박부터 무기 구입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들이 집어 삼킨 것은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청와대)이 아니라 사회..
김태용 감독의 영화 (2006)에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공효진)은, 엄마의 애인인 유부남의 집에 쳐들어간다. 온 가족이 모인 단란한 식사 시간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아저씨! 우리 엄마 진짜로 사랑해요?”라고 묻는다. 아저씨는 자기 부인과 자녀들 앞에서 차분하게 말한다. “그래, 나 너희 엄마를 죽도록 사랑한다.” 거짓말을 기대하고 ‘불륜 아저씨’ 집에 화풀이를 하러 갔던 주인공은 풀이 죽어 돌아선다. 나는 인간의 진정성을 믿지 않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진정성만큼이나 거짓말도 논쟁적이다. 거짓말이 항상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속된 말로 면전에서 ‘생까는’ 거짓말은 누구에게나 상처가 된다. 몇 분이면 탄로 날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잡아떼는 경우, 오랜 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문화계 성폭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트럼프 당선으로 최순실씨 뉴스가 가려진다는 우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 규모나 처벌받을 사람들은 다르지만, 2016년 우주의 ‘나쁜 기운’임엔 틀림없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결과가 의외이거나 경악스러울 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런 부류다. 트럼프는 당대를 대변하는 인간형이다.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어리석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