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살면 사람이 참 유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동차는 신발이 된 지 오래고 대중교통도 때론 막힐 뿐이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스마트폰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고 하루이틀이면 원하는 것이 배달되는 환경에서 재난은 영화에서나 스릴을 높여줄 장치에 불과했다. 더위나 추위가 좀 별스러웠지만 에어컨과 난방시설로 쾌적함을 더해줄 뿐이었다. 특히나 사계절로 단련된 나라에 살다보니 100년 만의 폭염, 1000년 만의 폭우는 해외토픽쯤으로 지나쳤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지구 차원의 변화라 누구도 비켜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체감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사는 동네가 80년 만의 폭우로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날 하필이면 서울 강남역 근처에 모임이 있어 뉴스에 나오는 장면들을 목격하였고, 평소 시간의 10배쯤..
최근 교육부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책을 발표했다가 교육계와 학부모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신임 장관이 경질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대통령에게 보고, 추진하려던 초등 입학연령 5세 학제개편안은 사실상 철회됐다.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교육부 수장이 현장 교육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 정책은 학생, 학부모, 현장 교사들이 공감하는 정책을 수립해야 그들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는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 교육 정책은 현장 파악, 여론 수렴 및 공론화 과정, 그리고 인프라 구축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도 절차를 무시하고 정책을 밀어붙였으니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과거 ‘대입 제도 개편’의 실패가 보여준 교훈이다. 교육부의 ‘5세 입학 추진’은 선 발표 후..
윤석열 정부의 학제개편안은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내놓았던 학제개편안과 꼭 닮았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6-3-3제를 5-5-2제로 바꾸면서 입학연령을 6세에서 5세로, 고교 졸업연령을 18세에서 17세로 낮출 것을 공약했다. 아울러 과도기 4년간 1학년 구성을 12개월간 출생자가 아닌 15개월간 출생자로 하면 학제개편이 완료된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안과 똑같지 않은가? 윤석열 정부안은 안철수 후보안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론이 비등하면서 각종 비판론이 쏟아지고 있는데, ‘5세는 원래 초등학교에 안 맞는다’는 식의 주장은 삼가자. 제도는 구성하기 나름이어서 심지어 4세도 다수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검토해볼 만한 비판론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4년..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호를 타고 2018년 남극에 다녀왔다. 거친 파도로 악명 높은 드레이크 해협은 ‘천로역정’처럼 괴로웠지만, 일주일쯤 견디며 항해한 끝에 만난 남극은 상상 속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사방 맑은 하늘 아래 새하얀 빙산이 두둥실 떠다니고, 저만치 앞에서 펭귄과 고래, 물범이 노닐었다. 낭만적인 첫 장면이 전부는 아니었다. 남극은 금세 얼굴을 바꿔 강풍 블리자드를 뿜었고, 바다에는 크릴을 낚는 대형 어선들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진을 치고 있었다. 크릴을 어선에 빼앗긴 펭귄과 고래는 힘겹게 먹이를 찾아 헤매야 했다. 두 얼굴의 남극이었다. 그 남극을 서울 한복판 도심 쇼핑몰에 옮겨왔다. 그린피스 남극 사진전이 지난달 14일부터 31일까지 용산역 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콘크리트와 인공..
윤석열 정부가 제시하는 스포츠 정책 비전은 ‘모두를 위한 스포츠, 촘촘한 스포츠 복지 실현’이다. 온 국민이 스포츠를 즐기고, 스포츠의 가치를 함께 누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2021년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생활체육참여율’은 60.8%다. 즉 주 1회, 30분 이상 규칙적으로 스포츠 활동을 한 인구가 열 명 중 여섯 명이니, 열 명 중 네 명은 규칙적인 스포츠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에 정부는 국민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어느 생애주기 단계에서도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유인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생애주기별 스포츠 활동의 정착을 위한 첫 단추는 학교체육 활성화다. 유·청소년기는 신체 발달이 이루어지고 운동 습관이 형성되는 시기로, 이 시..
주식시장은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2025년부터 만 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의 부작용을 곧바로 간파했다. 정책 발표 후 처음으로 개장한 지난 1일 사교육 업체들의 주가는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정부는 공교육을 살리고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이라고 강조했지만 수용자들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보충설명을 하고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1호 교육정책은 결국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로 나흘 만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이 학제 개편을 논의할 시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초·중·고교와 대학을 어떻게 둘지, 각급 학교에 몇 살에 들어가 몇 년씩 다니게 할지 등을 정해놓은 학제는 공교육의 기본틀이다. 한번 정하면 오랜 시간 변화 없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
지난 6월24일 열린 2040년 서울 도시기본계획 공청회 현장의 일이다. 도시계획 발표는 곧 개발 호재에 대한 관심이 된다. 부동산 분석가들은 관련 글을 쏟아내고 대부분의 언론도 이를 받아쓰기 바쁘다. 공청회에 참석하는 이들 다수의 관심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날의 분위기는 좀 달랐고 그래야 했다. 서울연구원이 마련한 초안은 대놓고 기후위기를 외면했고 이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들이 있었다. 초안의 핵심은 ‘시민 삶의 질 개선’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양대 축으로 하여 미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도시다. 이를 위한 6개 공간으로 보행 일상권 조성, 수변 중심 공간 재편, 미래성장 거점으로 중심지 혁신, 다양한 도시 모습을 위한 도시계획 대전환, 철도 지하화 등 기반시설 ..
차술차작(借述借作). 남의 답안을 베끼는 것이다. 수종협책(隨從挾冊)은 시험장에 책을 몰래 가져가는 일이고, 입문유린(入門蹂躪)은 대리시험이다. 정권분답(呈卷粉遝)은 답안지 바꿔치기이고, 외장서입(外場書入)은 시험장 밖에서 답안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1818년 조선 순조 때 성균관 학자 이형하가 상소문을 올려 지적한 ‘과거팔폐’(科擧八弊·과거시험의 8가지 폐단) 중 5가지다. 나머지 셋은 수법이 한 수 위다.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혁제공행(赫蹄公行), 매수한 사람을 시험장 경비원으로 바꿔 놓는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답안을 아무렇게나 써내고도 조작으로 합격하는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등이다. 옛날부터 단순한 커닝을 넘어선 시험 부정행위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고려 때 시작된 과거시험의 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