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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만날 때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막판에는 늘 어머니의 불같은 분노로 끝맺게 된다고 했다. 명절 선물을 노골적으로 불만족스러워했고, 남편과 아기가 있는데도 쌀쌀한 날씨에 보일러를 틀지 못하게 했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착한 딸 노릇을 하려고 애썼다. 한동안 부모와 관계를 단절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효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는가 싶었다. 다음에는 부모와 심각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어 박해하는 대상이 필요한가 싶었다. 1년 이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은 후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부모가 부자예요? 부모한테서 받을 유산이 많아요?” 꽤나 깊은 무의식을 자극하는 질문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온순한 말투로, 그러나 문득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생의 에너지를 어디서 얻어요?”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앉아 있었다.

가끔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가 묻는 후배들이 있다. 그 젊은이들은 내면에서 남몰래 무기력과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에는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다른 삶을 살고 싶지만 변화를 꾀할 힘이 없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욕망이 내면에서 갈등하는 것을 경험하느라 거의 탈진한 듯 보였다. 그들의 무기력은 일견 게으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우울증처럼 보이기도 했다. 삶의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지 물을 때조차 그들은 한숨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보통 삶의 목표에서 에너지가 나온다고 알고 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기차가 달리고, 발원을 세우면 원력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을 프로이트의 언어로 표현하면 결핍감에서 욕망이 나오고, 욕망에서 욕동이 나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욕동, 즉 생의 추진력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에너지가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자기보존 본능과 자기파괴 본능이다. 누구의 내면에서나 사랑과 불안감이 서로 싸우고, 소망과 시기심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해왔다. 식민지의 분노, 전쟁의 불안, 가난의 복수심 등을 에너지로 사용하여 거의 한 세기를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탈진한 듯 보인다.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면 밖으로 성취하는 것만큼 안으로도 내상을 입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중년의 위기에서 맞는 무력감도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한 결과라고 한다. 우리 사회도 중년의 위기와 비슷한 처지에 다다른 듯 보인다. 거듭 불안 상황을 맞이하고 도돌이표 궤적을 그리는 것은 결핍감과 복수심을 추진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로감을 호소하며 보양식에 집착하는 중년들도, 어딘가 탈진한 듯 보이는 우리 사회도 저 젊은이들처럼 생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지 묻는 듯하다.

 

▲ “젊은이의 무기력은 때론 게으름 혹은 우울증으로 보인다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 아닌 내 생을 위해 힘을 내자”

프로이트 이후 대상관계 학자들은 생애 초기 중요한 타인이 한 사람의 정서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기는 생애 초기 엄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을 탐험하러 나가는 시기를 맞는다. 엄마를 등지고 몇 걸음 걸어나가던 아기는 문득 멈춰 서서 엄마를 뒤돌아본다. 엄마가 거기 있다는 것,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몇 걸음 걸어나간다. 어느 순간 엄마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엄마에게서 먼 곳까지 놀러나가는 유년기의 어린이도 주기적으로 엄마에게 되돌아와 그 곁에서 쉰다. 엄마와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고, 엄마의 관심을 끌어 웃음 띤 환호를 받고자 한다. 그렇게 마음에 에너지를 채워 다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간다.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묻는 젊은이들은 무의식에서 저 유아기의 좌절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어떤 이는 유아기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상태로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의미 있는 타인과 안정된 애착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기만의 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개념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삶의 목표가 없기 때문에 생의 에너지도 없다.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면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인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 세대가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생을 이끌어나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불안과 분노가 섞인 양분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 후 후배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불안감의 절반은 엄마 거네요.” 앞서 말한 여성도 어떠한 이유에서 유년기에 안정된 사랑과 지지를 주는 엄마의 보살핌이 부족했다. 자신이 엄마가 된 지금도 엄마 무릎에 앉아 쉬면 생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유아기의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무의식에서.

작심삼일의 시기가 다가왔다. 정초에 세운 새해 목표가 첫 번째 시험에 부딪히는 때이다. 내면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들이 대립하면서 무력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담배를 끊어야 하나, 노력한다고 목표가 반드시 성취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내면에서 그런 갈등이 인다면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질문해보면 좋을 것이다.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힘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어떨까 싶다. 무력감으로 인해 꼼짝 못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의미있는 타인을 찾아내어 유익한 관계를 맺도록 제안한다. 편안하고 배울 것 많은 사람을 만나 천천히 생을 배워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동일한 목표를 지닌 이들의 자조 모임에 가입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된다. 모임은 그 자체가 중간 공간의 역할을 하면서 구성원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다.

진정한 생의 에너지는 이타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타적인 유전자가 인류를 살아남게 한다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 사랑이 가장 힘이 세다고 제안하는 세계 종교의 지혜가 그 명제를 뒷받침한다. 유아기 좌절에 사로잡혀 있거나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타적인 마음을 내기 참 어렵다. 그 마음이 에너지 고갈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젊은 친구들에게 억지로라도, 그냥 마음만으로라도 이타적인 생의 목표 한 가지를 마음에 새겨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빈 마음만 내는 그 일도 어려워한다. 우리 사회도 그럴까봐 두렵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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