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정의를 세우지 않고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세웠다. 8월14일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선고는 피고인을 심판하지 않고 피해자를 심판한 부정의한 판결이다. 업무상 위력을 작동시키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석할 의지와 역량이 없음을 이번 판결은 보여준다. 페미니즘 대통령을 선언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법부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건’이다. 재판부는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간에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적자기결정권이 모두 국민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까? 노동권, 교육권, 참정권 등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실현되어 왔는가? 피해와 차별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서 권리가 실현되도록 싸워..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앞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을 출국금지한 검찰은 두 사람이 재임 당시 임 전 차장의 ‘윗선’으로 사법행정권 남용과 관련된 각종 조치를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전직 대법원장·대법관에 대한 출금 조치는 극히 이례적이다. 법원이 두 사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자, 검찰 자체적으로 강수를 둔 것으로 본다. 대법원은 인권과 정의의 최후 보루이며, 대법원장은 그 수장이자 표상이다. 전직 대법원장이 재임기간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출금된 것은 사법부의 불행이고 수치다. 물론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고구마 줄기 캐듯 쏟아지는 의혹들..
법원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0부는 19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희생자 1명당 위자료 2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목포해경은 승객 퇴선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희생자들은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선내에서 구조 세력을 기다리다 긴 시간 공포감에 시달리며 극심한 고통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연한 결과다. 사법부는 앞서 선주 일가, 선장과 선원, 해경 직원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번 판결은 개개인에 대한 단죄에 이어 초동 대응과 구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
내일이 제헌절이다. 특히 올해는 제70주년 제헌절이라 더더욱 뜻깊다. 1948년 7월17일에 제헌헌법이 만들어져 공포된 이래 70년의 헌정사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민주헌정이 권력자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헌법을 지켜낸 이들은 주권을 실현하려는 평범한 국민들 자신이었다. 그래서 제헌절 70주년이 더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촛불혁명의 현장에서 국민들에 의해 가장 많이 애창되었던 현행헌법 제1조 제2항은 제헌헌법에서는 제2조에 규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썼다. 이때 “주권”은 추상적 권력으로서 ‘국가의사를 전반적·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최고권력’으로 정의되며,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
‘1,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2,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다만’이라는 부사에 대한 설명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자주 쓰는 단어도 아니고, 뜻을 보니까 무슨 말인지 더 헷갈리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만’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문장을 이어주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강씨(32·남)는 올해 1월7일 오전 2시20분께 제주 시내 한 마트 맞은편 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피해자 A씨(58·여)에게 다가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주먹을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피해자의 옷과 머리채를 잡아 길바닥에 넘어뜨린 후에도 얼굴과 몸을 수차례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 코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피해자인 A씨와 전혀 알지 못하는 ..
근대는 픽션, 즉 만들어진 사회이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비근대적 사회의식은 픽션에서 불안을 느끼지만, 근대정신은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재생산한다”고 했다. 이렇게 근대를 구성하는 픽션의 정점에 헌법이 있다. 국가라는 거대한 픽션의 설계도이다. 군사정부의 성실한 마름이던 대법원이 공정하고 독립적인 사법부라는 서구적인 픽션을 갖춘 것은 역설적이게도 1987년이 계기다. 시민혁명의 대상은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정권과 법원이지만 6월항쟁은 법원에 손을 대지 않았고, 법원은 혁명에 무임승차했다. 어설픈 타협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실체를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판사가 이명박 정부 당시 대법관이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한 검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이 됐다. 세상..
김명수 대법원장이 김선수 변호사와 이동원 제주지법원장,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은 대법원 구성 다양화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은 역대 대법관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의 범주를 모두 벗어났다. 김 변호사는 법원·검찰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재야 출신의 노동·인권변호사다. 이 원장은 고려대 출신으로 법원행정처 근무 없이 재판에만 전념해온 정통 법관이다. 노 관장은 젠더 관점을 지닌 이화여대 출신 여성 법관으로 여성의 지위와 권한에 관해 주목할 판결을 여럿 남겼다. 대법원은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 기대를 염두에 두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 선별했다”고 밝혔다. 외형상 인적 구성이나 대법관..
사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먹고 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공정한 재판을 통해 쌓아올린 국민들의 신뢰뿐이다. 진정한 사법부의 권위도 높은 법대 위의 판사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들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국민들의 신뢰 속에서 세워진다.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이 사법부다. 그런 사법부에서 일어난 이번 사법농단 사태이기에 국민들이 느끼는 충격과 배신감이 그만큼 더 큰 것이다. 지난 5월25일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법관 사찰의 정황들이 지난 2차 조사결과 발표 때보다 더 구체적으로 확인되었고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판결들을 청와대와의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혹을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