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을 상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가 1심에서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이번 사건은 이씨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라며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이씨가 받고 있는 범죄 혐의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기소 후에도 반성은커녕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왔다는 점에서 당연한 판결이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으로 수사가 이뤄져 기소된 유명인사 가운데 첫 실형 사례라는 의미도 있다. 양형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판결 내용이다. 재판부는 기존 성폭력 사건 판결과 달리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토대로 유무죄를 판단했다...
드라마 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
지난 4월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 교실 창문에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한다)’ ‘위 캔 두 애니싱(We Can Do Anything·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등의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었다. 앞서 이 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설문조사를 한 뒤 교사들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고발하자 재학생들이 ‘창문 미투’로 호응한 것이다. 당시 337건의 응답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성폭력을 직접 경험했다는 응답만 175건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이 감사에 착수했고, 지난달 말 학교 측은 파면·해임 각 1명을 포함해 18명의 교사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이 학교 사례는 학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폭로하는..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방식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라면 취해야 할 행위’를 일반화·유형화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는 강제추행·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모 갤러리 대표 ㄱ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본 원심을 깨고 ㄱ씨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한 뒤 법정구속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가 피해자 김지은씨의 피해 전후 행동을 근거로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과 대비된다. ㄱ씨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피해자 ㄴ씨가 추행 후 즉각 항의하지 않았고 ㄱ씨와 헤어진 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점을 무죄 근거로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
지난해 초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희망을 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이제는 여성들의 삶이 바뀌겠구나!’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올해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품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폭력을 증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떤 어려움과 파장을 가져올지 알면서도 여성들은 용기를 냈다. 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으니까. 여성의 삶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꾸리는 등 범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경..
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참석했다.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희정 무죄” 소식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동승한 여성들도 술렁거렸다. 이번 재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력 인사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답’이기도 하고, 김지은씨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른 미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위력(威力)에 대한 인식이다.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경험한 위력의 정도가 의사 표현을 불가능하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이들도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 행동에 대해 자기주장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왜 그런 관계를 ‘유..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 전문(114쪽)을 읽었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법리. ‘문제적 판결’이 나올 때, 법관들은 법리 뒤에 숨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에 묻는다. 법리에 따라 판단했는가?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형법 303조 1항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토록 하고 있다. ‘위력으로써’라 했을 뿐,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한 바 없다. 대법원 판례도 다르지 않다. 위력이 폭행·협박 등 다른 수단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면 위력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약자를 복종시키기에 위력이다. 물리력이 작용했다면 위력간음이 아니라 강간죄로 기..
사법부가 정의를 세우지 않고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세웠다. 8월14일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선고는 피고인을 심판하지 않고 피해자를 심판한 부정의한 판결이다. 업무상 위력을 작동시키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석할 의지와 역량이 없음을 이번 판결은 보여준다. 페미니즘 대통령을 선언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법부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건’이다. 재판부는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간에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적자기결정권이 모두 국민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까? 노동권, 교육권, 참정권 등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실현되어 왔는가? 피해와 차별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서 권리가 실현되도록 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