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직접 소통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철학을 지향합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에 등장하는 문구다. 작년 8월19일 개설한 이래 지금까지 12만여건의 청원이 올라왔다고 한다. 매일 수백건이다. 30일간 20만명의 동의가 모아지면 청와대가 답한다는데, ‘응답하라 청와대’를 외치는 청원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개인 민원성 청원 등 별의별 게 다 있지만 입법사항에 속하는 청원이 주를 이룬다. 청와대가 개입할 수 없는 청원도 있고, 현행법상 수용 불가능한 것도 있다. 청와대는 청소년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주취감형 폐지, 조두순 출소 반대, 가상통화 규제 반대 등에 대해 이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재용 항소심 판결에 분노한 국민들은 즉각 ‘정형식 판사 판결 특별감사’ 청원..
2014년 5월13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교사 43명의 글이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뒤인 5월15일 스승의날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후속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교사들의 성명이 낭독됐다. 그해 6월까지 박 대통령 퇴진을 주장한 교사는 123명, 일간지 광고 등에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 교사는 161명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이들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세월호 관련 여론이 잠잠해지자 교육부와 보수 단체를 시켜 교사들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집단행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200여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100명 가까운 교사들이 지금도 재판과 교육청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 지난달 30일 최저임금 1만원 등을 요..
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진실’에 대한 기억뿐이다. 건너가지도 못한 진실, 건너갔으나 닿자마자 변형된 진실, 나에게 비로소 도달했으나 알 수 없었던 그의 진실. 상호모순되는 진실들이 어느 순간 뒤죽박죽 엉키면서 안개가 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진실이 어느 시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지 어디선가 공허한 바람 소리도 난다. 그때의 진실을 이제 와 감정으로 만져본 것뿐이데 어느새 해지고 있다. 진실은 본래 그토록 연약한 것일까. 박사 과정 초기 시절 꽤나 여러번 지도교수들과 사회과학에서의 ‘사실’과 ‘의견’에 대해 논쟁을 했다. 어느 날 나는 두 분의 지도교수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비정규직 확대에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해보겠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분이 나..
지난 1월9일은 304명의 귀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10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참사의 원인, 과정, 결과가 지닌 이해 불가의 무능과 사악함에 대한 분노는 인간은 본시 망각의 동물이라는 표현이 끼어들 자리조차 없애야 하지만, 맹목으로 확산되던 세월호 피로감과 못된 버릇을 못 버린 종북론의 마녀사냥,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변함없는 후안무치의 조직적 방해로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다 밑바닥에 박힌 세월호는 우리들 심장 밑바닥에 박힌 가시다. 맨밥 꿀꺽 삼키듯 덮어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가시의 존재는 더 분명해지고, 고통은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슬퍼하며 비루한 공범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날 ..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밝히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열렸지만 궁금증 해소는커녕 의혹만 증폭되고 있다. 국가 안보 실무 책임자로 대통령에게 24시간 보고 체계를 유지해야 하는 국가안보실장은 박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서면보고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당시 대통령의 위치를 알지 못한 탓에 집무실과 관저 두 곳에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서면보고를 올렸다고 진술했다. 중대 재난이 발생한 상황에서 국가안보실장이 대통령의 소재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이 서면보고를 수령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반 기업의 말단 사원이라도 일을 이렇게 처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
올해 초, 매화 꽃봉오리가 젖꼭지처럼 부풀었을 때였다. 별 기별도 없이 그는 톱과 사다리를 트럭에 싣고 내 작업실로 왔다. 폭설을 뒤집어쓰고 쓰러진 마당의 소나무를 일으켜 세우는가 싶더니 우지직 끊어졌던 가지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내가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게 안중근 의사 유묵 소장 여부를 물었다가 뜬금없이 검찰에 기소당했을 때에도 그는 법원 앞에 누구보다 빨리 얼굴을 내밀었다. “자네도 그런가? 나도 분이 안 풀려서 긍가 입맛도 없고 통 잠도 안 오네.” 그는 세월호 참사 얼마 후에 나를 호출했다. 급한 일을 대충 마무리한 나는 그의 집으로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집 마당에 당도했을 때 그는 없었다. 마당 귀퉁이에 걸린 화덕에서 뭔가가 푹푹 끓고 있었는데 김이 올라오는 ..
한 유명한 책의 서문을 빌려 지금의 대한민국을 나는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세월호라는 유령이.’ 지금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을 흔들고, 광장을 사람들로 메우고, 촛불과 횃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전에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라는 정식명칭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거듭 ‘세월호 7시간’을 추궁하고 있다. 매스컴도 연일 최순실 국정농단과 함께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에 대한 해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참사로부터 2년 반이 지난 현재, 왜 세월호는 자꾸 돌아오는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와 김탁환의 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