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앞 자유발언대 트럭에 선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진주의 19살 젊음이의 명징한 정치발언, 민회나 시민평의회 논의 등을 보면 오늘의 광장은 촛불만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정동(情動)의 정치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요즘 일본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스트리트의 사상’(모리 요시타카), 그리고 분노의 정동이 자본과 권력에 의한 ‘하이재킹 당하는’(이토 마모루) 국면과도 다르다. 타격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정치적 단죄를 이루고 아래로부터 정치사회를 구성해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직접정치 실험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수구체제는 ‘잘살아보세’의 유신망령과 허구적 복지담론을 한국 사회가 허용한 결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행보를 두고 벌써부터 말들이 많다. 지난 9일 권한대행이 된 이후 그의 자세가 과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고건 총리가 대통령 대행을 하던 모습과 확연히 달라서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본분을 넘어 대통령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만하다. 그제 유일호 경제부총리 유임을 국회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게 대표적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황 대행이) 대통령이 된 것처럼 (국회) 출석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흘리는데, 대통령 된 게 아니다”라고 꼬집은 것은 이에 대한 불만의 표시다. 어제 보수 일색의 학계·언론계 인사들과 오찬간담회를 하면서 참석자를 밝히지 않다가 뒤늦게야 마지못해 공개한 것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권한대행답지 않은 비밀주의에 ..
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
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
시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 이틀 뒤였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원 최강서가 자살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한국외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이 이어졌다. 왜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자살했을까? 노동자들 죽음의 행렬을 초래할 만큼 선거가 중요했나? 하지만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그 어떤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선거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국면에서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폐지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
올가을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100만, 200만명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와 근 두 달 동안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프랑스 남쪽 님(Nimes)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를 외쳤던 신화를 떠올리게 하였으니, 만인의 입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2016년 12월9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어떻게 기록할까? 돌이켜보면, 4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는 좀 이상했다. TV토론에 나와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중국에 불파불입(不破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파괴가 없으면 새로운 건설도 없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촛불혁명은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불립불파(不立不破)라는 말도 있다. 건설이 없으면 파괴도 없다는 뜻이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어도 새 체제 건설에 실패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탄핵 결정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음의 질문을 서둘러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가? 여러 측면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소위 ‘87년 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시키는 길은 무엇인가? 87년 체제는 1987년 헌법을 제도적 기초로 하기 때문에 개헌이 이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안이 체제전환은 차치하고라도 정..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후 새누리당 친박근혜계와 비박근혜계 간 내부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친박계는 그제 심야에 급히 모여 ‘혁신과 통합보수연합’ 모임을 결성하더니 연일 비박계를 공격하고 있다. 어제는 친박계 이장우 최고위원이 나서 김무성·유승민 의원의 과거 발언을 끄집어내 인신공격을 했다. “배신과 배반의 아이콘인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는 한마디로 적반하장·후안무치”라고 말했다. 온갖 전횡으로 당을 망쳐놓고도 도리어 큰소리를 치니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박 대통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것은 친박이나 비박 모두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 무게로 따지자면 친박의 책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무겁다. 친박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공범이다. 사전에 국정농단을 막지 못했으면 사후 시정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