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도 봄이지만영산홍은 말고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어린잎 돋듯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더 짙어지기 전에사랑도 거기까지만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거기까지만 정희성(1945~)연두는 새로 갓 나온 잎의 빛깔이다. 연한 초록의 빛깔이다. 맑은 초록 혹은 조금은 덜 짙은 초록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시인은 당신의 봄이 연둣빛 거기까지만 이르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영산홍이 아직 피지 않은, 진달래꽃이 겨우 막 피는 그 봄의 첫머리까지만 닿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사랑도 그 정도와 그 범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연두의 빛깔 거기까지만 당신의 봄을 펼치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연두의 빛깔은 풋풋하고, 순수하고, 설레고,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엄마가 나 되고내가 엄마 되면그 자장가 불러줄게엄마가 한 번도 안 불러준엄마가 한 번도 못 들어본그 자장가 불러줄게 내가 엄마 되고엄마가 나 되면예쁜 엄마 도시락 싸시 지으러 가는 백일장에구름처럼 흰 레이스 원피스며칠 전날 밤부터 머리맡에 걸어둘게 나는 엄마 되고엄마는 나 되어서둥실 하재연(1975~) 하재연 시인은 시 ‘하나의 사람’에서 우리 개개인의 단독적인 존재를 빗대어서 “희고 차가운 빙하의 껍질 위에/ 대고 있는/ 나의 빨간/ 두 개의 발바닥”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우리는 외롭고 추운 존재이다. 그러나 엄마가 있고, 엄마가 있어서 엄마는 딸과 아들을 품속에서 기른다. 낮고 고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잠을 재우고, 도시락을 싸서 쥐여주고, 원피스를 사서 입힌다. 누워 곤히 잠이 든 아이의 머리맡..
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김용택(1948~) 우리의 살림은 산 아래 혹은 물가에서 이뤄진다. 그 공간에서 세간을 갖추고 한집안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다. 기쁜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다. 보람이 있어서 여한이 없다고 여길 때도 있고, 회한이 남을 때도 있다.시인은 그 옛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산처럼 물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산등성이가 부드럽게 뻗어 내리는 산처럼 온순하게 살고자 바라고, 스스로 낮추면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물처럼 선하게 살..
파도 위로 호랑무늬 깃을 펼치며 대지를 움켜쥔 나비가 날고 있다 대양 너머 저 멀고 먼 산언덕에서 작은 들꽃 무리들이 피었다 지면서 비바람 헤치고 찾아올 나비를 기다리고 구름 뒤의 달은 나뭇잎에 매달려 쪽잠 자며 고치에서 부활하는 영혼을 지켜보고 있다 최동호(1948~) 제왕나비는 캐나다 남부, 미국 대륙, 중앙아메리카에 주로 사는 왕나비류의 하나로 꽃가루 매개종이다. 아메리카의 제왕나비는 매년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에 캐나다를 출발해 장장 5000㎞를 날아가서 멕시코의 고산지대에서 겨울을 난다. 숲의 나무에는 수천만 마리의 나비들이 날아와 열매처럼 매달리는데, 이 시기를 사람들은 망자(亡子)를 기리는 기간으로 여긴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나비와 함께 찾아온다고 믿는 것이다. 저편으로부터 이쪽으로 멀고 ..
풀씨 하나 날아 자연이 산다 풀씨는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난다 날다가 물에 뜨면 물 타고 가고 담 넘어 어느 집 뜨락 혹은 다람쥐 고라니 산새 깃들여 사는 산야(山野) 철조망 넘어 북에도 남에도 거침없이 날아가 앉는다 막힘이 없다 풀씨 하나 날아 자연이 산다 더럽히지 말라 이 맑은 물 맑은 공기 맑은 마음 강민(1933~) 풀씨는 어디에라도 날아간다. 바람에 실려, 물에 떠서 걸림도 막힘도 없이 날아간다. 어느 집 조용한 뜨락에 내려앉고, 산과 들에 내려앉는다. 산과 들에 사뿐히 내려앉아 다람쥐, 고라니, 산새와 함께 사는 자연이 된다. 풀씨는 철조망을 넘어서 날아간다. 풀씨에게 막힌 통로란 없다. 풀씨는 누구와도 무엇과도 만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 시인은 시 ‘동오리 15’에서 “그대 바람으로 떠..
그 여자가 동백나무 그늘의 끝을 막 지나가고 있을 때그가 지나갔다 참새 몇 마리가 은행나무 이파리 사이에 숨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을 때그가 지나갔다 은회색 승용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그가 지나갔다 노란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지어 동네를 돌고 있을 때그가 지나갔다 왕개미 한 마리가 제 몸만 한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힘겹게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가고 있을 때그가 지나갔다 세상에!얼굴도 없이이경림(1947~)한 여자와 참새 몇 마리, 승용차, 아이들, 왕개미가 각각 활동할 때 얼굴도 없는 그가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냇물 위에 떠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이배 같은 시간이 아닐까. 혹은 매일매일에 늘..
나뭇잎은 흥에 겨워건들대는 거야.천성이 그래,사는 게 즐거운 거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비 내리면 비와 함께새들이 노래하면새들의 날개에 얹혀같이 날아보는 거야. 그런 게 즐거움 아니냐고너도 건들대보라고,죽기 전에 후회 없이한번 건들대보라고. 김형영(1944~) 건들대는 것은 몸과 마음에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일 테다. 언덕을 넘어서오며 버드나무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가만가만 흔들어놓는 봄바람처럼. 조금은 들떠서 조금은 신이 나서 흥에 겨워 살아도 좋겠다. 바람이 저편으로 가면 바람을 따라서가고, 비가 오면 빗방울처럼 수면 위를 뛰고, 새들이 울면 새들의 악보에 맞춰 노래를 하면서 살아도 좋겠다. 너무 무겁고 딱딱하게 살지 않고,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고. 살구꽃이 피는 일에도 신명이 들어 있고, 보리밭..
밤마다 쓰러지는 것을 일으키고 끌어올리고 또 잡아 세운다 일으키는 창유리의 아침이 눈부시지 않으면 물렁뼈로 엎디이고 말리 허기처럼 질긴 습관과 밥알처럼 끈덕진 관성이 뼈대를 세우고 호두알 깨뜨리는 책임과 밤껍질 발라내는 의무가 근육을 굴리나 때로는 널푸른 공중 그네를 매달고 싶었으리 쓰러지는 밤이 우물 속처럼 아득하더라도 무릎 당겨 세운 침대가 되는 꿈은 꾸지 말기를 어느 날 하늘을 날게 된 양탄자는 태생이 배를 깐 바닥이었으니 바닥을 타는 법을 터득해야 바람의 행간을 타고 날 수 있으리 - 이선영(1964~) 절망의 계곡과도 같은 검은 밤이 있지만, 다시 산봉우리를 넘어오며 빛나는 새날 또한 있다. 환한 유리창으로 새날이 들어온다. 바닥을 밝히면서. 바닥에 누운 것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면서. 새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