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입술을 빠져나온동그라미 담배 연기처럼뜨거운 목구멍 문양으로쓰라린 목젖 문양으로 흩어지는 연기를한 코 한 코 엮어태피스트리를 짠 사람이 있다 호시탐탐 달아나는 바람의 코를 꿰어벽에 걸어놓고야 말겠다고 핏빛 노을 번져드는 사막에웅크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던 사람그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셀 수 없는 정지화면이모여 한 생애가 되고 한 번 멈춰두고 영원히 잊어버린영화의 한 컷처럼 나는지직거린다 한 코만 놓치면주르륵 풀어져버리는마음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정채원(1951~)태피스트리는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을 짜서 넣은 직물을 뜻한다고 한다. 한 코 한 코를 서로 끼워서 뜨개 옷이 되듯이 하나하나의 색실을 엮어서 면직물이나 모직물 등을 만드는 것일 테다. 시인은 우리의 생애도 씨실 혹은 날실과 같은 수많은..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 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현택훈(1974~) 솜반천은 제주의 도심 속에 있는 생태하천이자 천지연 폭포의 상류에 있는 물줄기이다.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른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넓은 바다를 ..
마치 한개의 돌복숭아가 익듯이 아무렇지 않게 열(熱)한 땅 기운 그 끝없이 더운 크고 따스한 가슴… 늘 사람이 지닌 엷게 열(熱)한 꿈으로 하여 새로운 비극(悲劇)을 빚지 말자. 자연(自然)처럼 믿을 수 있는 다만 한오리 인류(人類)의 체온(體溫)과 그 깊이 따스한 핏줄에 의지하라. 의지하여 너그러이 살아 보아라. 박목월(1915~1978) 땅의 기운이 없으면 무엇도 위쪽으로 자라날 수 없다. 뜨거운 땅의 기운이 있어서 한 알의 돌복숭아도 계절에 맞춰 익는다. 시인은 하나의 성숙과 무르익음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거를 “크고 따스한 가슴”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인류에게도 땅처럼 견고하고 큰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인류의 체온과/ 그 깊이 따스한 핏줄”이 있음을 잊지 않아서 늘 너그럽게 살자고 말한다.우리의..
장사 끝난 죽집에 앉아 내외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옆에는 막걸리도 한 병 모셔놓고 열 평 남짓 가게 안이 한층 깊고 오순도순해졌다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운 아내가 반짝, 한 소식 넣는다 ― 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 초식동물들 같아 내외는 늙은 염소처럼 주억거리고 한결 새로워진 말의 밥상 위로 어둠이 쫑긋 귀를 세우며 간다 고증식(1959~) 날이 저물고 장사를 마친 부부가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탁주도 한 잔 곁들이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죽을 먹으러 찾아온 손님들의 온순한 성품에 대해 말을 나눈다. 작은 가게에서 따뜻한 죽을 내놓으면서 만난 소박하고, 자상하고, 명랑하고, 자잘한 정이 많은 사람들의 됨됨이에 대해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라는 드넓은 평원(平原..
마루에 앉아 여름비를 본다 발밑이 하얀뿌리 끝이 하얀대파 같은 여름비 빗속에 들어초록의 빗줄기를 씻어 묶는다 대파 한단열무 한단부추, 시금치 한단 같은 그리움 한단 그저 어림잡아 묶어놓은내 손 한묶음의크기 고영민(1968~) 박용래 시인은 억수 같은 장대비의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그 속에는 누군가 자신을 목놓아 부르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장대비 빗줄기를 “상아(象牙)빛 채찍”이라고 해 영혼의 고독과 불안과 통증을 표현했다. 이 시에서는 여름비를 대파의 하얀 뿌리 같다고 썼다. 여름비를 보면서 대파며 열무며 부추며 시금치 한단을 묶는 것을 상상한다. 기른 것의 싱싱한 한단을 묶는 일을 상상한다. 또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싱그러운 생각도 한다. 이 시의 특별한 매력은 풍경을 바깥에 서서 평면적..
장에 간 엄마는 잘 안 오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안 오시네 엄마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배추를 팔아 신발을 사 오실 엄마 엄마는 신발을 잊고 엄마는 빨랫비누만 소금 됫박이나 사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이란 신발은 오지 않고 좋은 날만 따라왔던 것이다 언 발로 사위를 찍고 사라진 고라니의 겨울 산정도 신발처럼 저 너머에 솟아 있었던 것이다 고라니는 떠나가고 좋은 날은 혼자 남아 기다렸던 것이다 고라니도 신발을 깜빡했다고 들켜주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좋은 날은 어디선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정윤천(1960~)엄마는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엄마는 배추를 팔러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가 새 신발을 사서 오시길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엄마는 빨..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로 차마 붐비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무릿매 맞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유성우(流星雨) 속에 잠드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의 고요에 차마 가슴 데는 사랑이 흰 눈발처럼 쉬지 못하고 차마 에도는 사랑이,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오태환(1960~) 눈보라가 치는 내면이 있다. 내면의 공간에 온통 눈보라가 벌떼처럼 붐비는 이가 있다. 시인은 사랑을 겪는 이의 속마음을 눈보라 치는 공간에 빗댄다. 그리고 그 눈보라를 돌팔매 혹은 몰매,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 외면하는 듯 고요하거나 무심한 감정 등으로 이해한다. 사랑을 겪는 이의 심정은 순간순간 격렬하고, 빛나고..
이전엔 늘 잠이 모자랐다학교 늦을라, 흔들어 깨우는엄마가 미웠다 군용 모포 끌어당기는기상나팔도 출근 재촉하는알람도 싫었다 더 자고 싶었다아예 깨고 싶지 않은 꽃잠도 있었다꿈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새벽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꽃잎도 사금파리도 아스라한 별똥별인데속절없이 깨어나 은하의 기슭뒤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어쩌다 돋는꿈 한 촉도 오래 정박하지 못했다꿈의 잔해가 부스럭거렸다 굽 낮은 튜바의 음색이었다 장문석(1957~)어리고 젊은 나이에는 잠이 많아 늘 잠이 부족했는데 예순이 되니 잠이 없어졌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새벽이면 일어나 “은하의 기슭”을 이리저리 헤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순의 나이는 장중한 저음(低音)을 내는 금관악기인 튜바의 음색이라고 소회를 밝힌다. 예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