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 동백숲길에 서서그 이름 기억나지 않으면봄까지 기다리세요. 발갛게 달군 잉걸불 꽃들이사방에서 지펴진다면알전구처럼 밝혀준다면 그 길미로처럼 얽혀 있어도 섧디설운이름 하나기억 하나돌아오겠지요. 노향림(1942~)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동백나무들이 빗살처럼 촘촘하게 늘어선 숲길이 있다. 그 숲길을 걸으며 한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그이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아득하게 멀어졌다.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시인은 그 숲길에서 봄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글이글하는 불과도 같은 붉은 동백꽃들이 피는 봄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동백꽃들이 알전구처럼 환하게 피어나면 시간의 미로 속으로 사라졌던 그이의 이름과 얼굴과 기억이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그리워하면 동백숲길은 우리의 잃어버린, 부서진..
연못 속에 구름이 살고 있었다자신이 쏟아부었던 분량의 소나기그다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살았으면소금쟁이가 됐을까1초에 자기 몸길이 백배나 되는 거리의 물위를가볍게 걸어다니는 소금쟁이가물속에 사는 구름의 생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풀섶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종일 두 앞발을 비비며 우는 소리흐르는 시냇물에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며여름 한철 온 생을 빌고 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뙤약볕 시골길을 걷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루나무 꼭대기파란 연못에 내 전생이 환하게 보이다까무룩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아무도 없는 시골길너무 환한 생의 정면과 적막이 무서워 울었다 권대웅(1962~) 연못의 수면에 구름이 비치었다. 활발한 구름은 한 차례 소낙비를 뿌렸다. 연못의 수면에 소금쟁이가 떠다니고 ..
능소화 담벼락에 뜨겁게 너울지더니 능소화 비었다 담벼락에 휘휘 늘어져 잘도 타오르더니 여름 능소화 꽃 떨구었다 그 집 담벼락에 따라갈래 따라갈래 달려가더니 여름내 능소화 노래 멈췄다 술래만 남은 그 옛집 담벼락에 첨밀밀첨밀밀 머물다 그래그래 지더니 올여름 장맛비에 능소화 그래 옛일 되었다 가을 든 네 집 담벼락에 - 정끝별(1964~) 여름이 오고 능소화가 피었다. 고개를 내밀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능소화가 피었다. 여름 내내 능소화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운다. 달군 솥처럼 뜨거운 하늘 아래에 열정적으로 꽃을 피운다. 그처럼 옛집 담벼락에도 능소화가 여름을 살다 갔다. 옛집 골목과 담 아래에는 노래와 이야기와 달콤한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 옛집 담벼락에 능소화도 ..
고요는 그릇이 아니어서 물에 헹구거나 부실 일도 없다 다만 바람이 들어 와그의 등짝을 어루만지고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추썩거리기도 한다. 또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와 들썩들썩 들쑤시지만 꼼짝을 않는다. 일체가 변하지만 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할 리 없다고 시름이 홀로 깨어 먹 갈고반야경이나 베껴 쓰는 그 곁에이 새벽녘 고요는 뼈나 근육도 없이그냥 그대로 그린 듯 앉아 있다. 홍신선(1944~)시인은 새벽녘에 깨어 홀로 고요와 마주한다. 고요는 한 사람처럼 시인의 방에 앉아 있다. 물론 고요는 조용하고 잠잠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만.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개 짖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고요는 고요를 유지한다. 그것들이 고요를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은 새벽녘의 이 고요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
잣눈을 지고도 끄떡없는,더 새파란 그늘을 펼친 주목 옆에고사목 하나 모가지 부서지고어깨가 깨졌지만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죽음 속에서죽음을 넘어마지막 큰 가지를 북대 쪽으로가라, 너는 네 길을 가라혼자서 가라, 거기에 아무것 없을지라도 굶주린 멧돼지와피투성이 삵과통곡하듯 번쩍이는 빙벽들의 그믐밤을 부르며 전동균(1962~)잣눈은 척설(尺雪)과 같은 뜻이다. 많이 쌓인 눈을 일컫는다. 말라서 죽은 나무 위에 눈이 한가득 쌓였다. 그러나 나무는 꿋꿋하게 섰다. 이 가지 저 가지가 군데군데 꺾였으나 위를 향해 곧게 섰다. 의연한 기품으로. 새파랗게 그늘을 펼치며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때보다 더 흔들림이 없이 반듯하게 섰다. 시인은 이 고사목으로부터 기개를 본다. 굽히지 않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립하는 지조..
당신 방에 앉아 침대 옆에 놓인 시집을 읽습니다당신이 비운 집한쪽에 놔둔 식물에 물을 주라 하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누워도 봅니다냉장고에 들어 있는술 한 병 꺼내 마셔도 좋다 하였기에술만 마실 수 없어 달걀 두 개를 삶습니다 아, 희미한 삶의 냄새이 삶은 달걀을 어디에 칠까요무엇에 부딪쳐 삶을 깨뜨릴까요 이병률(1967~)집을 비운 사람의 방에 잠시 들른 사람이 있다. 집을 비운 사람과 그 집을 방문한 사람은 서로 일상에서 친하게 교유(交遊)하는 사이. 메마른 화분에 물을 줘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러 가서 그이처럼, 그이가 읽던 시집을 읽고, 그이의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것을 꺼내기도 한다. 그이가 되어본다. 그럴 때 시인은 책을 펼치고, 눕고, 혼자 먹는 이 일이 다름 아닌 삶의 희미한 냄새라는 생각을 문..
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내가 들여다보면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이태수(1947~)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맑고 차고 푸른 우물물을 길어 올리던 때가 있었다. 어릴 적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면에 내 작고 동그란 얼굴이 비치던 우물이다. 윤동주 시인이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고 노래한 그 우물이다. 시인은 옛 우물에 나무 그림자와 작은 새의 그림자와 희미한 낮달..
명사십리 모래알이 많고 많아도제 몸 태우면서 존재하는저 별의 수보다 많으랴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에도저절로 피어난 꽃이 있었겠나뜻 없이 죽어간 나비가 있었겠나 너도 나도 그래,살고 싶어서 태어난 것살아보려고 지금은 앓고 있는 중이지이승하(1960~)아프지 않은 생명은 없다. 모두 다 고통의 속사정이 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식물의 푸른 덩굴이 팔을 뻗어 위쪽을 향해 자라듯이, 우리의 삶도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바닷가 모래밭에는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지만, 그 수는 제 몸을 불태우면서 빛을 내는 별의 수만큼에는 이르지 못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존재들이 곤란을 견디고 있다. 고통 없이는 빛을 볼 수도 얻을 수도 없다. 반짝이는 별의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