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이라도 꺼내봐미소라도 날려봐 조금은 가벼워도 괜찮아순결하지 않아도 괜찮아노래가 아니어도 괜찮아 아픈 것이 부끄러움은 아니니깃털 속에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믿어봐 너 없는 공중은투명한 폐허일 뿐이야 여긴 병원이 아니라나는 너를 치료할 수 없지만 입을 맞춰줄게부력을 채워줄게 너의 근력을 믿어봐너의 의지를 믿어봐 고영(1966~) 아픈 새가 있다. 예전엔 공중을 투명하고 비옥한 영토로 만들던 새였다. 시인은 아픈 새에게 공중의 높이와 공중의 쾌청함을 돌려주고자 한다. 새가 없다면 공중은 황무지에 불과하기에. 몽골의 시인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가 “풀은 모두 나무/ 돌마다 산/ 넓은 이 세상/ 사물은 모두 중심// 깃은 모두 새/ 새마다 하늘/ 풍요로운 이 삶의/ 모든 날들이 새롭다”라고 노래했듯이 새가 ..
그래 살아봐야지너도 나도 공이 되어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공처럼, 탄력의 나라의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지금의 네 모습처럼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정현종(1939~)떨어진 공은 바닥을 탕, 탕 치며 다시 튀어 오른다. 용수철처럼 튀어 가볍게 떠오른다. 빠르게 그리고 힘이 넘치면서. 둥근 공은 쓰러져 몸져눕지 않는다. 늘 금방이라도 활동하겠다는 태세다. 어떠한 삶의 파도에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자세다. 생명의 불을 꺼뜨리는 일이 없다.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동력을 잃지 않는다. 둥근 공의 빛나는, 충만한, 싱싱하고 힘찬 기운을 상찬하면서 시인은 공을 “탄력의 나라의/ 왕자”라고 멋지게 ..
비가 오면 짐승들은 집에서 우두커니 세상을 바라보고 공사판 인부들도 집으로 간다 그것은 지구가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마당의 빨래를 걷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강을 건너던 날 낯선 마을의 불빛과 모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는 안 가본 데가 없다 빗소리에 더러 소식을 전하던 그대는 어디서 세상을 건너는지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낡은 집 어디에선가 물 새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시도 그만 쉬어야 한다 이상국(1946~) 비가 오면 벌여 놓거나 차려 놓은 것을 안으로 거둬들이게 된다. 비를 맞으면 안되는 것들은 치우거나 덮는다. 널어놓은 빨래는 거둬 안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잠시 일손을 놓는다. 누군가는 우산을 펼쳐 들고 식구를 마중 나가기도 한..
돌 하나를 집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돌 하나 밑에 돌의 그림자 하나가 생겼다 돌의 그림자 하나는 얇다 돌 하나에 눌린 돌의 그림자 하나가 오목해지면서 오그라든다 오그라든 돌의 그림자 하나가 돌 하나를 감쌌다 돌 하나를 감싼 돌의 그림자 하나가 있고, 돌 하나의 그림자에 감싸인 돌 하나가 있고, 돌과 그림자는 각각이고 돌 하나를 감싼 적막과 돌의 그림자 하나를 감싼 적막이 각각이다 돌과 그림자와 적막은 겹겹이고 적막은 몇 겹을 겹쳐도 투명하다 - 위선환(1941~) 위선환 시인은 최근에 새로운 시집을 펴내면서 이렇게 썼다. “사물은 낱이고 자체(自體)다. 언어는 사물을 드러낸다. 사물을 드러내는 언어와 언어가 드러내는 사물은 하나다. 언어는 사물이다.”‘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이라고 했..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박준(1983~) 옛 시간에 엉성했고 서툴렀던 사랑이 가슴에 살았다. 음식을 나눠 먹었고, 또 나른하고 보드라운 시간이 좋았다. 남들만큼 잘살고 싶었다.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소소한 몸놀림만으로도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서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래와도 같은 빛이 있었다. 새 촉이 나듯이 새로이 올 내일이 있었다. 깊이 들지 못하는 선잠 같았던, 곧 깨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
두 손을 모아 강물을 받아요 그 물로 얼굴을 비벼요 물고기 냄새와 달빛 냄새가 나네요 아침 해가 강물에게 들려준 얘기를 느낄 수 있어요 손에서 얼굴 냄새가 나요 평생 화장수 한번 바르지 않았죠 슬픈 날은 얼굴에서 별 냄새가 나요 반짝반짝 흘러내리는 별 내 몸 어딘가 이리 많은 별이 있었다니 신비해요 별이 있어 세월 내내 행복했지요 별이 있어 해와 달도 외롭지 않았지요 슬플 때면 강으로 가요 쭈그리고 앉아 강물로 얼굴을 비벼요 얼굴이 환해지니 그리운 당신에게 갈 수 있어요 곽재구(1954~) 깨끗한 강물을 두 손으로 떠서 세수를 했으면 좋겠다. 물고기들의 집인 강물을 떠서. 초승달과 만월의 빛이 밤새 하얗게 내린 강물을 떠서. 그렇게 강물로 얼굴을 감쌌으면 한다. 슬픈 날엔 얼굴에서 별 냄새가 난다는 의미..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 아직 부서지지 않은 돌 아직 정을 맞지 않은 돌 아직 푸른 이끼를 천사의 옷처럼 두르고 있는 돌 아직 말하여지지 않은 돌 아직 침묵을 수업 중인 돌 아직 이슬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돌 그리고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은 돌 아직 조금 빛을 품고 있는 돌 유강희(1968~) 한곳에 가만히 앉은 돌멩이가 하나 있다. 햇살 아래 잠든 듯이. 아직은 생김새가 태어난 모양 그대로인 돌멩이다. 손을 타지 않고,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채로. 푸른 이끼도 입고 있다. 날개를 접은 채. 태어나지 않은 언어를 갖고 있는 돌멩이. 내내 잠잠하게 있는 돌멩이. 아침이면 부시고 맑은 이슬이 이마에 데구루루 구르는 돌멩이. 그리고 한 번 나의 옷깃을 스쳐간 돌멩이. 내면에는 순수와 사랑과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