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의 기억은 따뜻하다.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고, 흰 양말 열 켤레를 사고, 망원시장에 들러 복숭아 몇 알을 샀다. 일요일 저녁에는 면 셔츠를 입고 스키야키를 먹으며 무연고 무덤과 양치류의 우울은 밀쳐두었다. 태풍 매미가 오던 해, 여름의 철학이나 새벽 두 시 첫 눈송이를 받던 손바닥은 기억하자.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절판된 책을 빌린 행운과 당신 이마를 때리는 초저녁 싸락눈을 사랑하자. 등 뒤로 멀어지는 이별은 용서하자. 쓸쓸하고 여윈 연남동에서도 이를 악물고 견딜 만했으니까. 장석주(1955~) ‘연남동’이라는 이 동네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보통의 동네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약국과 상점과 식당과 네거리와 시장과 도서관이 있고, 사랑의 싹틈과 낙화가 있고, 휴일의..
보청기 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한다. 누가 들을까 봐도 아닌데 그리운 문소리도 있는데. 귀 조금 밝히고 보니 이즘 사는 일 조약돌 밑으로 꼬리 감춘 눈석임물. 흐르긴 흐르는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는가? 감각들이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싸락눈 내리는 기척 분명한데. 눈과 귀는 창 앞에서 더듬대고 있다 그래도 볼펜처럼 이만 끝! 아닌 게 다행? 어디까지가 다행일까?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숨 쉬고 소리로 노래하고 몸부림치며 소리로 밑도 끝도 없이 깊어지는 이 겨울밤. 황동규(1938~) 나이가 들면 귀로 소리를 듣는 힘도 약해진다. 귀에 보청기를 꽂은 시인은 무뎌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없어지듯이 차..
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1935~) 한때 바람을 쐬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종일 비가 와서 바깥은 경극의 배경과 잘 어울렸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먹구름과 싸우면서 제 높이를 슬슬 키웠던 능선 그림자도 한 움큼 불러 물에 담갔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양철 주전자가 물의 온도에 접근하면서 마침내 쇠붙이까지 물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송재학(1955~) 비가 오는 날이어서 날씨는 마치 경극의 극적인 장면을 보는 듯하다. 찻잎을 우려 차를 마실 때에 시인은 푸른 찻잎에서 고요의 가느스름한 눈썹을 본다. 찻잔에는 능선의 그림자도 비쳤다...
짐승을 잡아 엿을 고는 성탄일 딸이 전복을 따야 농가목돈 물고 딸이 소라를 잡아야 학자금 갚고 사나흘 솥단지 안에서 엿기름이 졸아든다 엿을 먹어야 지픈 바당에 든다 솔칵타는 성탄일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눈 살 때까지는 동짓달에도 숨비소리를 뱉어야 한다 시집간 딸이 물질 간 성탄일에 궁퉁이 어신 눈이 내리고 베롱 베롱 부끌레기 부끄지 말라고 뭉근 불로 무쇠솥을 지들리는 어머니 김병심(1973~) 이 시는 제주 방언으로 썼다. “지픈”은 깊음을, “솔칵”은 소나무 가지를, “쉐”는 소를, “궁퉁이 어신”은 눈치 없음을, “눈 살 때까지”는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를, “베롱 베롱”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불빛을, “부끌레기 부끄지 말라고”는 거품이 넘치지 않은 상태를, “지들리는”은 누름을 뜻한다. 그리..
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장옥관(1955~) 모든 것에 뒤쪽이 있다. 그곳은 잘 닿지 않는다. 한꺼번에 힘을 몰아 쓰더라도 미치지 못한다. 마치 손으로 긁으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너른 등짝의 한 곳처럼. 달의 이면(裏面)처럼. 경상도 사람은 ‘어’와 ‘으’를 옳게 발음하지 못하는데 이 영역도 달의 뒤편 같은 것이요, 내가 볼 수 없는 ..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며 퍼져나가고 있다 -김기택(1957~) 화살이 하나의 표적에 도달하고도 화살이 그곳으로 그 방향으로 쏠리고 몰리는 힘은 곧바로 멈추지 않는다. 과녁의 안쪽으로 계속 퍼져 들어가려고 한다. 화살을 맞은 과녁 또한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 격동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
마음을 들여다본다.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발을 내밀어 디뎌본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누가 보지 않을까? 길 아닌 곳으로 방향을 잡아 파고든다. 풀숲을 헤쳐나간다. 나무 뒤에도 숨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멀리 내다본다. 마음을 밟고 있는 몸 끝으로 삶의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낸 것들을 떨어뜨린다. 너는 중얼거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깨어난다. 채호기(1957~)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마음의 영토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곳은 우거진 곳이며,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이며, 어지럽게 갈래가 져 있는 곳이다. 또한 깊고, 불분명하고, 변하며, 덮여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내 떨어뜨린 것이 ‘중얼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