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누구나 홀로 와선제 그림자 거두어 저물어 가는 것 빛나던 날의 향기도,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도오직 한 알 씨앗으로 여물어 남는 것 바람 크게 맞고비에 더 얼크러지고햇볕에 더 깊이 익어 너는 지금 내 손바닥에 고여 있고나는 또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생의 젖은 날개 파닥파닥 말리며꼭꼭 여물어, 까맣게 남는 것 배창환(1955~) 가을에 거둬들인 씨앗이 있다. 이 씨앗을 뿌리면 싹이 트고, 잎과 줄기가 자라서 펼쳐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여물고, 다시 씨앗으로 남을 것이다. 씨앗은 혼자 어두운 땅속에서 잘 준비되어 마침내 빼주룩이 움트겠지만 이후에는 돌풍과 궂은비와 땡볕을 만나고, 또 개화(開花)라는 환호의 때를 만나고, 가을의 끝까지 무르익을 것이다. 그리고 한 톨의 까만 씨앗으로 남을 것..
갈바람이 흰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새 날아간 자리 가지처럼 파르르 눈동자 떨리던 사람바스락거리는 별을 끌어다가 반짝, 담배에 불붙이던 사람산등에 걸린 달을 눈으로 담은 사람흙 파인 돌계단에 앉아 찬찬히 처마의 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뒹구는 바람을 끌어다가옷깃 안으로 여미던 사람문득, 돌아선 곳에서 나를 달빛 든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 그 사람 바라보다가 고라니 까만 눈으로 바라보다가 잡으려 하니그 자리에 별이 스러졌다 박경희(1974~)어떤 것은 눈에 들어오고 또 무엇과는 눈길이 마주친다. 시인은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고 그 사람이 만나고 바라보고 있는,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함께 감각한다. 그 사람은 갈바람, 별, 달과 달 그늘, 바람 등을 느끼고, 시인도 함께 이것들을 감각한다. ..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오히려 말이 고팠다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땅끝으로 날아다닌다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우리는 누구나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천양희(1942~) 지나치게 많은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홍수를 이룬 말들 속에서 오히려 말의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말에도 때가 있고, 말에도 공터가 있다. “말의 공터”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 말의 비어 있는 땅을 볼..
조각달을 앞세우고 간다.여울물을 기어오르는 피라미처럼공기주머니 하나 달랑 차고소유한 게 적어도 물 따라 산다. 풀잎에 알을 낳는 풀벌레처럼주어진 시간 그대로,청설모가 굴밤 한 톨 물고 가듯가랑잎 같은 시를소중히 갈무리하고 산다. 소슬한 가을바람 따라 산다.새빨갛게 익은 석류가저절로 팍, 하고 깨어지듯작은 소리를 알아듣는아름다운 마음으로 산다. 권달웅(1943~)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삶의 자세를 배운다고 말한다. 여울물에 밝게 뜬 편월(片月)을 앞세우고 헤엄치는 피라미는 가진 것이 없어도 물의 흐름에 맞춰서 산다. 풀벌레가 풀잎에 알을 낳고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청설모가 졸참나무의 열매 한 톨에 만족하듯이 시인은 가랑잎 같은 시 한 편을 짓고 사는 일 외엔 더 바라는 게 없다. 그리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
우리는 태어난 게 아니라도착한 거예요.추운 생명으로 왔지요.추운 몸으로 왔어요.그때가 아마 늦은 밤이었지.북극의 생모(生母)가 찾아왔어요.눈 포대기에서 보채는 동생들을 안고 얼음을 짜 먹이며얼음의 말로 말을 가르치듯.이 밤 어느 웅덩이에 고여 있을 그대들.수없는 밤 고여 있었을 그대들.머리맡에 밤바람이 주저리주저리 한 말.그 밑바닥 말.바닥에 가 닿은 말.그대를 잉태했던 북극의 어머니가 평생 물걸레질한 그 얼음 바닥의 무늬가 손금에 박힌 것처럼.굴복할 수 없는 무의 물결처럼.궁핍처럼 스스로를 더 강하게 얼려야 하는 얼음처럼.조정권(1949~2017)조정권 시인은 세속의 시를 고독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
멸치야 갈치야 날 살려라너는 죽고 나는 살자에야 술배야가거도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를밥상머리에서 환청으로 듣곤 한다 벼야 조야 배추야 시금치야콩아 닭아 김아 마늘아 날 살려라너는 죽고 나는 살자놓인 밥과 반찬에 따라 가사를 바꿔 부르며숟가락 젓가락을 들곤 한다 그토록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소화가 되겠느냐 핀잔하는 이 있겠지만나는 오히려 그이에게 권하고 싶다술배소리 음미하며 한 끼 먹어보라고그래야 음식마다 맛이 새롭고 먹고사는 일이 더욱 생생하게 소중해지므로 최두석(1955~) 시인은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 어부들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그물을 던져서 먹을 것을 얻으려 할 때 부르는 소리를 소개한다. 시인은 바다에서 난 것을 밥상머리에서 먹을 때 이 술배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들판과 자연의 것으로 ..
바람 부는 날이면전화를 걸고 싶다하늘 맑고 구름 높이 뜬 날이면더욱 전화를 걸고 싶다 전화 가운데서도 핸드폰으로멀리, 멀리 있는 사람에게오래, 오래 잊고 살던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을 찾아내어 잘 있느냐고잘 있었다고잘 있으라고잘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나는 오늘바람이 되고 싶고구름이 되고 싶은가보다가볍고 가벼운 전화 음성이 되고 싶은가보다 나는 지금 자전거를 끌고개울 길을 따라가면서너에게 전화를걸고 있는 중이다. 나태주(1945~)시인은 개울이 흘러가는 걸 보고 따라가면서, 자전거를 끌고 홀로 가면서 누군가를 떠올려 전화를 한다. 멀리 떨어져 살고, 한참을 잊고 살았던 한 사람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의 일을 묻고, 오늘의 안부를 전하고, 내일의 안녕을 기원한다. 따뜻하고 밝고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1917~1945) 한 사나이는 산기슭의 불룩하게 나온 귀퉁이를 돌아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간다. 우물의 저 깊은 수면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의 움직임이 비치었고, 맑은 바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