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서랍 속 여권을 종종 꺼내본다. 올여름 몽골을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 머무는 이주 외국인들의 법률지원 활동을 주로 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올여름 그동안 이 단체에서 도움을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이주민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오래간만의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을 그들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은 팍팍한 일상의 작은 활력소가 된다. 빳빳한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첫 장 중앙에 커다랗게 찍힌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국적란의 ‘REPUBLIC OF KOREA’라는 영문자도 낯설지 않았다. 두 단어는 낯설어 보이는 증명사진 속 나의 모습보다 더 익숙했다. 여권은 내가 태어나고 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하루가 지났다. 혹여 놓치는 뉴스가 없는가 짬짬이 챙겨 보고 있으면, 날마다 선물처럼 소식들이 쌓인다. 경남하고도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 다른 대선후보를 찍었음에 틀림없었을 사람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세상 바뀌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 열하루가 지난 사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한결 가뿐해졌다. 풀 베는 낫은 더 잘 드는 것 같고, 집 고치느라 뚝딱거리는 나무는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저녁 밥상에 앉은 식구들이 더 웃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믿게 되었다. 일본의 이름난 대목장으로 니시오카 쓰네카즈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로 치면 경복궁이나 종묘 같은 건물을 짓거나 새로 고치는 일의 우두머리 목수. 그는 작은 몸놀림 하나, 말 한마디, 허투루 뱉..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을 바란다. 동시에 그가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를 기원한다. 위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향후 5년의 성패는 그가 얼마나 국민, 특히 자신의 지지층을 효과적으로 실망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은 국민들의 절망을 딛고 큰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진실을 전하고 이해를 구하는 대신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적이다. 문재인은 자신의 공약을 전부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인들 역시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대다수의 심기를 거슬러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난 4월28일, 문재인 캠프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
지방에서 대기업 근무할 때, 주중 저녁 8시쯤이면 부모님과 통화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곤 했다. “얼른 쉬어라. 피곤하겠다.” 퇴근해 저녁 먹고 운동 마치고 나면 보통 그 시간이었다. 잠들기 아쉬운 시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자격증 또는 영어 공부를 했다. 12시쯤에 자야 보람차게 보낸 느낌이었다. 주말이 되면 카페나 도서관을 가거나,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에 갔다. 주5일제가 2005년 즈음 공공기관부터 시작돼 대기업까지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대기업 중 많은 경우도 주말근무와 야근이 당연했지만 어쨌거나 “토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생각이 금방 자리잡혔다. 많은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과 ‘주말이 있는 삶’을 강조했고, 쉬지 못하는 박탈감은 공분의..
-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나는 올해 초까지 10년 남짓 일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명목상 쉬는 날은 있었지만 실제로 쉬는 날은 아니었다. 출입처에 작은 일만 생겨도 먹던 밥을 내려놓고 달려가 기사를 썼다. 문화부에 있던 지난해에는 기무라 다쿠야가 속한 아이돌그룹 ‘스마프’의 해체 소식에 부리나케 소속사 사무실로 뛰기도 했다. 게다가 주로 서울에서 일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신문사에는 전근이 많다. 나도 입사한 뒤로 나라, 도야마, 오사카, 도쿄를 돌며 일했다. 회사 선후배들을 보면 배우자가 전업주부가 아닌 이상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오사카에서 결혼한 직후 도쿄로 발령 나면서, 오사카 지방 공무원인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지난 1월 신문사..
들보 위에 딱새가 둥지를 틀었다. 지난해와 같은 자리를 찾는다. 봄날이 금세 더워졌다. 처마 아래 새가 둥지를 트는 것도, 마당에 도마뱀이 돌아다니는 것도, 뒤안 감나무 잎 쪼삣(뾰족)하던 것이 피는 것도 후다닥이다. 집은 금세 들이닥칠 여름맞이가 한창이다. 날이 하루하루 더워지는 사이에, 구들장을 새로 놓았다. 이사왔을 때에 놓은 구들을 들어낸 것이니까, 십 년 만. 처음 시골 살림을 시작할 때는 불 때는 구들방에 대한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어서 집을 고칠 때 구들부터 새로 놓았다. 1960년대에 지어진 작은 세 칸 집인데, 구들장 위에 보일러가 깔려 있었다. 그래 방 두 칸 가운데 한 칸은 보일러를 뜯고, 구들을 다시 놓아서 잠자는 방으로 쓰자 했던 것. 그러나 그때에는 구들을 새로 놓는 것하고,..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
집은 모두에게 소중하다. 몸이 유일한 재산인 노동자들에게 집은 특히 소중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므로 소모된 노동력은 오로지 충분한 휴식을 통해 재충전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제대로 된 휴식이 불가능한 숙소에서 머물게 하면서 계속 일을 시킨다면 이는 사실상 강제노동이다. 1970년대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청년 전태일도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맨 먼저 요구한 것이 일터 다락방에 마련된 노동자 숙소를 폐지하고 정식 기숙사를 설치하라는 것이었다. 일터 다락방에 얼기설기 만든 숙소는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