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았던 학교에 다시, 아이가 왔다. 올해 새 학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마을의 모든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문을 닫았던 작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한 명의 입학생으로 시작하는 학교. 예전에 어느 나라에선가는 학생 한 명의 통학을 위해, 폐선될 예정이었던 기차를 졸업 때까지 몇 년이나 더 연장해서 운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한 명의 학생을 태우기 위해 다니던 작은 기차. 우리집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몇 년 새 아이들이 조금 늘어나는 듯하다가 다시 줄고 있다. 면 지역 안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이사 오는 집이 많지 않다면 얼마나 학생 수가 줄어들지 어림짐작하고 있다. 이제는 온 나라에 아이들이 ..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 ..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3월4일, 제19차 촛불집회의 구호였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10일, 헌재의 판결로 구호는 현실이 되었다. 11일, 제20차 촛불집회는 그야말로 봄맞이 축제였다. 날씨도 영락없는 봄날, 낮부터 광화문 광장은 기쁨과 설렘을 감추지 못한 사람들로 붐볐다. 블랙리스트,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을 위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6주기를 맞아, 탈핵을 정부에 요구하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나비행진’이 이어졌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흥겨운 한마당이었다. 그렇게 봄이 온 것 같았다. 같은 날,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 지난 1월 전주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 중 자살한 한 여고생의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뜨겁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신설하고 사물인터넷(IoT)망 구축 등을 포함한 과학기술정책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규제를 개혁하고, 창업 드림랜드와 스타트업 특구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 왜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고민은 2009년 오바마 행정부의 ‘리메이킹 아메리카(Remaking America)’라는 슬로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조대기업들은 생산원가의 압박과, 글로벌 기업을 유치해 고용을 늘리겠다는 아시아 국가들의 노력으로 해외로 나섰다. 군수산업을 제외한 제조업 분야를 별 신경쓰지 않으며 금융자본만 키..
여기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제일 비싸다는 강남, 그것도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 바로 코앞 역세권에 비닐로 만든 둥지를 틀었다. 제대로 된 지지대 하나 없이 박스와 우산으로 천장을 겨우 받치고 있는 이곳은 비라도 조금 내리면 천장 구석구석에 물웅덩이가 고이고, 입구가 어디인지 찾기 힘든 기묘한 구조물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은 이곳을 ‘오성급 호텔’이라 부르며 500일이 넘도록 머물고 있다. 오성급 비닐 둥지 뒤로는 44층 높이의 마천루가 자리 잡고 있다. 롯데월드타워를 디자인하기도 한 미국의 유명한 건축설계업체 KPF가 설계한 삼성 서초사옥이다. 삼성전자 본사는 수원에 있지만, 삼성 서초사옥은 그동안 삼성그룹의 심장부 역할을 해왔다. 이..
아이가 다쳤다. 엄지손가락 뼈가 그야말로 ‘똑’ 부러졌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면서 “아주 말끔하게 부러졌네요”라고 했다. 초등 2학년 마지막 날. 온몸으로 기뻐하며 봄방학을 맞이한 결과였다. 이 추운 날에 친구들과 징검다리를 놓겠다며 커다란 돌덩이를 들다가 자기 손을 찧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도 크지 않았고, 별로 아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손가락에 밴드 따위를 붙이고는 몇 시간이나 더 놀다가 저녁 먹을 때 집에 돌아와서는, 그제서야 손가락을 내보였다. 그 정도였으니 뼈가 부러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야 읍내 병원엘 갔다. “오늘, 큰 병원으로 가실 거죠? 여기는 마취전문의가 없어서 수술 못해요. 단순골절이고, 핀 박는 거는 아주 간단한데, 아이라서 전신마취 해야 되거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 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총수가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
회사를 퇴직하고 영국여행을 다녀왔다. 오래된 산업도시의 ‘현재’가 궁금했다.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도시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영국의 ‘상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산업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진화했는지 궁금했다. 그 지역에서는 이제 ‘산업’은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조선산업을 제패했던 글래스고의 ‘드라이 도크’에선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텅 빈 지 이미 수십년이라 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업부터 중공업 부지에는 박물관과 미디어 단지가 들어섰다. 리버풀은 비틀스 관광상품으로 도배된 도시였다. 뉴캐슬 타인강에서는 ‘조선소’가 있었다는 푯말 하나를 찾았다. 영광을 누렸다던 산업도시들은 영화 에 등장했던 노인 연금생활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도시들은 반세기 동안 각각 100만 인구에서 절반이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