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원도 홍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법교육 강의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차로 꼬박 두 시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굽이굽이 산과 물이 어우러진 시골길을 제법 달려 마주한 산촌마을, 전교생이 서른여섯 명인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5학년과 6학년인 13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한 교실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보다 더 능숙하게 사회를 보던 6학년 친구의 진행으로 법과 관련한 짧은 강의와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크콘서트 시간을 가졌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아이들의 질문 수준이 상당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 사람을 한국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야 할까?”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던 내용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분위기를 한번 몰아가..
개그콘서트에 ‘아무말 대잔치’라는 제목의 코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던 몇몇 이들은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며 짜증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생겨난 단어, 개념, 유행이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에 차용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점심시간에 SNS에서 있었던 논란이 저녁 즈음이면 기사화되고, 예능프로에서는 속보 경쟁이라도 하듯 신조어를 받아들여 남발한다. 이쯤 되니 개그콘서트는 차라리 느긋한 편에 속할 지경이다. 어쨌거나 ‘아무말 대잔치’는 그 제목 만으로 이미 시대의 핵심을 선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난 일주일간 들어야 했던 ‘아무말’만 떠올려 봐도, 대잔치를 넘어 프로리그를 출범해도 손색이 없다. 상임위의 인사청문회에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고 ..
아이가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나무판자를 잇대어 만든 작은 문을 열고 새로 온 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살펴본다. 하루 이틀 지나면 병아리들이 닭장에서 나와서 널찍하게 쳐진 울타리 안을 돌아다닐 것이다. 세 아이 모두 밭에 오면 닭장부터 들렀다. 새 병아리를 들이면 더 자주 와서는 병아리를 보고, 낯을 익히고, 그렇게 몇 번 지나서 아이들은 병아리마다 별명 비슷한 것을 붙였다. 시골에 내려와 밭을 마련한 다음, 곧바로 한 것이 밭 한쪽에 닭장을 짠 일이었다. 닭장을 짜고는 얼마쯤 자란 병아리를 구해다가 닭장에 풀어놓았다. 봄에 넣은 병아리가 중닭이 되고, 제법 자라면 어느 때부터 달걀을 하나씩 낳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닭이 방금 낳은 따뜻한 달걀을 쥐어 보기도 했다. 며칠 달걀이 모이기를..
얼마 전 지인이 옆 사무실에 출판사를 차렸다. 이름을 ‘바틀비’로 지으려 한단 얘기를 들으니 ‘필경사’에 대한 예전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필경(筆耕)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는 필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속 등장인물인 바틀비의 직업이 필경사였다. 작중 그의 행동이 특이함에도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고, 작중인물들을 분석하여 사무직이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병증’에 대해 고찰하는 경우도 있다. 주거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당시 뉴욕의 월세는 소득에 비해 얼마나 비쌌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홈리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
최근 가장 애쓰는 일은 밥을 시간을 들여 15분 이상 천천히 먹는 것이다. 꼭꼭 씹어 먹고, 먹으면서 여유 있게 담소도 좀 나누라는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퍼붓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도 해 주란다. 점점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의 신체적 한계도 느낀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선배와 함께 회를 먹었는데, 회가 맛있어서 허겁지겁 집어 씹지도 않고 삼킨 채 ‘소맥’을 퍼부었더니 몇 년 만에 ‘오바이트’를 흥건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신 것보다 회를 꼭꼭 씹지 않고 먹어 사달이 났다면서 혼을 낸다. 밥 빨리 먹는 사람에 대한 규탄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열어둔 단체 카톡방에는 밥 빨리 먹는 회사 상사들을 보고 있자면 체할 것 같다는 기분을 토로하는 이야기..
“볕이 얼마나 뜨거운가, 등짝을 뜯어묵을라 카네.” 밭에 매달려 있다가 돌아오는 아주머니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고, 어린 고양이 두 마리가 가만히 지켜본다. 올해 마을에서 보는 새끼 고양이 전부. 여름내 제법 몸이 불어난 녀석들은 볕이 뜨거울 때는 나무 그늘이 지는 돌담에 올라앉아 있거나, 우리집 계단참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했다. 여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몸에 익었다. 막내 아이는 유난히 고양이를 좋아해서 한참 울다가도 고양이 소리만 나면 울음을 그치고 쫓아간다. 혼자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하고, 저녁이 되어서 뜨거운 바람이 조금 식으면 아이 손을 잡고 고양이를 찾아가는 고양이 산책도 한다. 지난 십 년 사이 해마다 마을에는 대여섯 마리, 혹은 예닐곱 ..
지난 7월15일, 최저임금위원회는 정부세종청사에서 11차 전원회의를 열고 2018년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확정했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고용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찬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고용감소가 불가피하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우려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언론들이 ‘업주보다 더 많이 벌어가는 알바’라는 선정적인 문구로 국민들의 불안을 파고든다. 최저임금 문제를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뻔한 수법이다. 자영업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비용 중에 일부일 뿐이다. 설비비, 인테리어비, 전기요금, 관리비, 임대료, 가맹점비, 대출이자 등 많은 비용이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다..
신혼여행 명목으로 독일을 쏘다니는 중이다. 독일에서 여행자로서 곧바로 운전하며 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운전하던 대로 했더니 졸지에 ‘난폭자’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움직일 기미만 있으면 차들은 멈춰섰고, 자전거가 옆에 지나가면 차들은 속도를 줄였다. 깜빡이를 켜면 옆 차로의 차는 속도를 줄이면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아우토반에서도 거친 운전자들은 차량이 가진 최고의 역량을 다 해 속도를 냈지만, 위험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속도가 아찔한 운전자들은 자연스럽게 우측 차로로 빠른 차들을 피했고 그때 역시 우측 차로의 차들이 충분한 안전거리를 만들어 줬다. 그들은 ‘안전거리’ 확보를 하나의 규칙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를 약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