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15세 이하 학생들은 시험시간에 동일한 시험지를 받지 않는다.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제가 각기 다르다. 왜 그럴까. 한 학급은 물론이고 전국의 같은 학년이 똑같은 시험문제를 받아드는 우리 실정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제도가 저 나라에서는 어떻게 ‘아무런 문제 없이’ 시행되고 있는 것일까? 엊그제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번에는 질문의 강도를 높였다. 미국 스탠퍼드대에는 시험감독이 없다. 학생들이 입학할 때 명예서약을 하고, 시험을 치를 때마다 답안지에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또 서명을 한다. 그럼에도 간혹 커닝을 하는 학생이 나온다. 이럴 경우 대학에서 어떤 처벌을 내릴까? 우리 학생들이 내놓은 답은 이런 식이었다...
사람은 사람끼리 사람에 대한 기대를 주고받는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이러이러 저러저러하리라는 대략의 믿음 말이다. 잘된 사람을 보면 흐뭇하고 다된 사람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도, 덜된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못된 사람을 보면 화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서투름과 미련을 통탄하고 남의 성숙과 완덕에 대해 경탄하다니 좀 이상하다. 그가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그 누군가에 대해 속상해하거나 화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실망, 그로 인해 입는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땅한 품위와 긍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확인하며 아프게 탄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절로 숙연해지거나 마음이 ..
대도시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하철은 낯선 사람들이 함께 이동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는 사소한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이따금 도마에 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여성들의 화장이다. 좌석에서 얼굴을 단장하는데, 간단하게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아예 작은 화장대를 펼쳐놓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도 하고 심지어 헤어그루프로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여성들 나름의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야근이 잦은 데다가 출퇴근 시간마저 길어서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직장 여성들은 부득이하게 지하철에서 짬을 내어 화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
비로소 산중이 고요하다. 산중 암자가 본시 한적할 터인데 왜 새삼 고요하다고 하는가. 지난 한 달 넘게 휴가철을 맞아 각지의 지인들이 사나흘씩 머물다 갔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넘게 암자를 찾아온 세간의 벗들에게 차를 대접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내년 초봄까지 마셔야 할 대흥사 녹아차가 바닥을 보였겠는가. 여름 내내 ‘산중 마담’ 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다. 벗들과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런저런 대화로 몸과 마음이 청신해지니 참 좋은 인연이구나 싶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의 만남이 모여 삶을 이어가고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순간도 소홀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올여름은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호기심 많고 ..
시인이면서 순천 효산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안준철 교사는 독특하게 수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바닥에 피어난 풀꽃을 휴대폰으로 세 번을 촬영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 가까이서. 그것을 다시 컴퓨터로 옮겨서 수업자료를 만들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질문 하나를 던진다. 이 세 장의 사진은 내가 어떤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찍은 것인데, 그 단어는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A자로 시작하고 여덟 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정답은 ‘approach’이다. (안준철, , ‘시사IN’ 7월25일자) 길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새삼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려는 교사의 정성이 돋보인다. 평소에 시선을 거의 주지 않는 미물이지만,..
제자가 여쭈었다. “제 안에 늑대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마리는 착한데 다른 한 마리는 포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택하거라.” 제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한 마리를 택할 수 있습니까?” 스승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며칠 뒤, 스승이 제자를 불러 물었다. “방법을 알아냈느냐?” 제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을 못하자 스승이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어떤 늑대냐?”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 노인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우화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일반화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저 인디언의 지혜는 우리 내면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 이상의 늑..
20년 전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현장을 취재한 어느 일본인 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사고 직후 많은 사람들이 부러진 다리의 양쪽 난간까지 몰려와 아래쪽의 수습 작업을 구경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아찔했다고 한다. 교량 전체가 위험한 상태고 그 난간은 방금 무너진 구조물의 일부이기에 더욱 불안했다. 또한 자칫 거기에서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그리고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지적된다. 한국인은 여러 가지 일에 과민하고 불안해하지만, 위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둔감하고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흔히 취하지만, 안전에 관해서는 무모한 낙관주의를 드러낼 때가 많다. 그동안 별..
언어는 거울이자 렌즈다. 비춰볼 수도 있고 들여다볼 수도 있다. 생겨나자마자 급격하게 확산되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말(飛沫), 상기도, 슈퍼 전파자, 밀접 접촉, 능동 감시, 국민안심병원 같은 용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학사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로운 말이 있다. ‘○○번 환자’와 ‘자가(자택) 격리’. 발음하기가 편치 않은 두 새로운 용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6년 전 신종플루 때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번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를 검색해보았더니 2009년 5월 국내 첫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51세 수녀였다. ‘1번’이 아니고 첫 번째였다. 2003년 사스 첫 추정 환자 역시 ‘1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