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아침. 동국대 정각원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3000배 기도를 올리던 중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동국대 학내 문제의 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 50일째를 맞은 부총학생회장 김건중군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기도를 멈추고 단식장을 찾았다. 건중군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학생에게 물어보니 동공이 풀리고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사태는 급박했다. 그날 동국대 이사회에서 학내 문제에 대한 납득할 만한 조처가 없으면 투신하겠다는 한 대학원생의 예고까지 겹쳐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이사진 전원 사퇴가 결정돼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바라만 보아도 아픈 자식인데….” 자식이 옳은 일을 한다는데 부모라고 해서 말릴 수 없다며, 단식 중인 아들을 설득해 달라는 학교 측의 권유를 거절한 건중군의 어머니도 병..
시민대학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쫓기고 불안해한다.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을 추구하느라 괴로워한다. 이들의 목표는 막연한 물질적 성공이고,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수익을 얻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도덕적 기초가 없는 세계’를 향해 표류하고 있다고 쓴 작가도 있다. 어떤 여행자는 이 나라 사람들이 길거리든, 도로 위에서든, 노천이든 극장이든, 커피숍이든 아니면 가정집이든 어디서든 대화할 때 ‘돈’이라는 단어가 빠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법학자는 모두가 최상층이 되고자 하는 병적인 조바심으로 인해 ‘무서울 정도로 정신착란이 빈발’한다고 언급했다. 한 출판인은 이 나라 젊은이들이 ‘햇빛을 빼앗겼다’라고 표현했다. 어느 ..
아이들을 얼마나 가르쳐야 할까? 사람 구실 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배움이 필요하지 않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맞다·틀리다, 깨끗하다·더럽다, 이 정도만 알아도 모자람이 없다. 여태껏 살아보니 삶의 이치는 ‘있다·없다’의 이진법에 달려 있었다. ①좋다와 나쁘다. 어떤 게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있을 게 있어야 좋다. 없을 게 없어야 좋다. 있어야 할 게 없으면 탈이 난다. 없어야 하는데 있어도 문제다. ②맞다와 틀리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참이다. 있는데도 없다 하거나 없는데도 있다고 하면 거짓이다. ③깨끗하다와 더럽다. 깨끗한 것은 무엇이고, 더러운 것은 무엇인가. 없어야 하는 것을 다 치워 없애면 깨끗하다. 치우지 않았거나 치우다 말면 더럽다. 사람답게 사는 비결은 ..
초등 5학년 아들이 학교에서 머리를 다친 채 집으로 왔다. 부모는 크게 놀랐다. 그런데 흥분한 엄마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차분했다. 아들에게 사정을 묻자, 말다툼 끝에 같은 반 여학생에게 맞았다고 했다. 다툰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화를 냈다. 당장 때린 아이 집으로 가서 따지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자초지종부터 알아보고 해결하자며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 아버지가 가해 여학생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사실 저도 당황스럽고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따님이 우리 애를 때린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제가 따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 될까요? 이 일로 아이들이 서로 상처 주고 원망하기보다 좋은 사이가 되는 기회..
시골집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30촉이 되지 않았을 백열전구 하나가 집 안을 밝혔는데, 환하다는 느낌보다는 낯설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낮에도 잘 보이지 않던 천장 한구석의 거미줄까지 보였다. 적나라한 것의 불편함을 그때 알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구가 자주 나가는 것이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흔들면 끊어진 은색 필라멘트가 파르르 떨곤 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의 (원성철 옮김, 오롯 펴냄)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미국의 작은 도시 리버모어의 한 소방서에서 매년 한 전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전구의 생일? 그 전구는 1901년 소켓에 끼워진 이래 지금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1970년대 시..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열아홉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만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망치라는 별명은 장터와 뒷골목을 휩쓸던 주먹의 우악스러움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랬던 그가 훗날 나환자들의 정다운 아버지가 되었다. 어찌 된 일일까? “형은 사람 패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어린 동생이 툭 던진 이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켰다고 한다. 행실은 모질었어도 가슴 깊은 곳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무엇이 살아 있었나 보다. 억센 손이라도 가만히 만져보면 따뜻하다. 밖에서는 몰라도 집에서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살가운 손이다. 통합진보당 해산부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까지 무엇이나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주먹에도 분명코 붉은 피는 돌 테다. 이 모든 게 비정상의 정상..
지난 한글날, 사흘간의 연휴를 맞아 아들과 아버지가 암자를 찾아왔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온 부자는, 이번 여행의 콘셉트가 느릿느릿 시간의 여유를 느끼며 감성을 충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길로 가볍게 산행을 다녀온 부자는 손수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끓여 도토리묵과 갓김치로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장작불을 지핀 따듯한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책을 펴들었다. 나란히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 부자의 모습을 나는 밤이 깊도록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몇 년 전 어느 정당의 대선 경선 후보가 내세운 구호가 생각난다. 아마 ‘저녁이 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 말을 듣고 크게 감탄했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그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구호에서 나는 성장과 소비의 악순..
이사 왔다고 떡을 돌리는 풍습이 급격하게 사라져 간다. 떡은커녕 앞집의 문을 두드리고 ‘신고’를 하는 일도 별로 없다. 아파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옆이나 위아래로 붙어 사는 집인데도 어쩌다가 마주쳤을 때 싸늘하게 외면하기 일쑤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나는 이웃과 우연히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한다. 이에 반갑게 화답하는 분도 있지만, 마지못해 최소한의 답례만 하는 분이 더 많다.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만 반응하고 곧바로 눈길을 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관계가 희박해지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세태가 일상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면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쉽게 말문이 트이는 것을 본다. 공원이나 산책길에서 반려견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