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관제데모 중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왔던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참가자에게 일당을 주는 ‘알바데모’를 벌여왔다는 게 밝혀졌다. 많은 이들이 추측해왔던 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들에게 용역을 준 곳들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재향경우회, 심지어 국가정보원, 청와대 등이었다는 의혹도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단체는 평균 한 해의 절반가량을 거리데모로 채웠으니, ‘동종업계’ 최고의 ‘수주 능력’을 자랑하는 단체였던 듯하다. 실제로 다양한 이슈들을 소화해내는 능력도 놀라웠고, 비교적 저렴한 일당임에도 알바 동원력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왔다. 심지어 좌파 단체들의 시위공간을 선점해서 벌이는 이른바 ‘알박기 데모’라는, 데모의 신상품을 활용해내는 창의력과 정보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데 여..
“죽어서 천당 가자!”는 것도, “사는 동안 복 받자!”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만, 경(經)자가 붙은 책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당장 살아야 하는 천국이어야 하고, 복이란 것도 저만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하는 동고동락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천당이니 복이니 하는 말은 되도록 가려서 하는 게 좋다. 만일 죽은 아이들은 천당 갔으니 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넉넉하게 보상받았으니 됐잖은가 하는 따위의 실없는 말을 쏟았다면 크게 뉘우쳐야 한다. 벌 받을 소리다. 그만 잊자, 하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억하라, 그리고 행동하라!”(루카복음 22:19)고 명령했다. 자신의 죽음을 잊지도, 가만히 있지도 말라고 했던 것..
“칼국수 어때요?” 지난 주말, 시 쓰는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에 올랐다. 서울의 북쪽 능선은 봄을 맞이하느라 숨이 가빴다. 아직 덜 늙은 후배는 꽃놀이 타령을 늘어놓았다. 내친김에 섬진강이나 강릉 쪽으로 내빼자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에도 일정이 빠듯했던 나는 어깨가 처지고 볼살이 늘어지는 사태에 대한 넋두리로 서울 바깥으로 나가자는 후배를 가로막았다. 스카이웨이에서 바라보는 서울 상공은 흐려 있었다. 꽃과 새순을 밀어올리느라 헉헉대는 숲 사이로 봄날 저녁이 빈틈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박명(薄明)이라고 발음해보았다. 박명. 헤어지기가 서러워 옷소매를 부여잡는다는 몌별(袂別)이란 말도 떠올랐다. 칼국수? 입맛이 칼칼하던 차였다. 좋지. 그래, 혜화동으로 내려가자. 성북동 비탈로 접..
땅끝 마을의 봄은 형형색색 꽃들이 피면서 시작한다. 지난겨울 펄펄 내리는 백설 위에 선연한 자태를 드러낸 붉은 동백에 이어, 3월 내내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내뿜었다. 지금은 온갖 새들의 노래와 함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이토록 눈과 귀가 즐겁다니! 지금 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청복(淸福)을 누리고 있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실감한다. 올해는 큰맘 먹고 암자 곳곳에 산수유와 수국, 수선화, 작약을 심었다. 나도 좋으려니와 암자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꽃 공양을 올리고 싶어서이다. 사계절 내내 숲에서 살다 보면 꽃은 그저 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타는 듯한 가뭄을 만나고 한겨울 모진 추위도 견뎌내야 한다. 병해충에도 맞서야 한다. 인생사와 별반 다..
원영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비정한 부모’에 대해 경찰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작위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해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검찰은 전담반을 만들어 이 혐의의 공소유지에 총력을 다할 것을 밝혔다. 누가 보아도 살인임이 명백한데, 그것도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너무나 악질적인 살인행위인데, 경찰과 검찰의 이런 모습이 좀 의아하다. 무려 3개월간 화장실에 가둔 채 1ℓ짜리 락스를 두 병이나 몸에 뿌리는 등 가혹한 학대행위를 해왔고, 사망 전날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 옷을 다 벗기고 찬물을 끼얹은 채 방치하여 죽게 했으며, 죽은 시신을 야산에 유기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웬만한 모의살인보다 더 악질적인데 미필적 고의 살인은 뭐고, 전담반을 만든다거나 총력을 다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뭔가. 그런데 실은..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연전연패하던 저녁, 하필 그날 회갑을 맞이한 남자는 사람이 어째 사람도 아닌 것에 질 수 있느냐면서 꺼이꺼이 길게도 울었다. 하마터면 같이 울 뻔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 같지도 않은 물건들에 당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해 착실하게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일인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은 채 총파국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지금 우리는 독재정치의 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사법부는 사실상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으며 의회 또한 허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돼 가고 언론의 자유는 압살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
이판과 사판, 전통적으로 절집에서 대중의 소임을 구분하는 방식이다. 세간에서 쓰는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판은 참선하고 경전을 연구하고 염불 수행에 전념한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재정을 관리하며 건물을 보수하는 일은 사판의 몫이다. 주어진 일의 특성상 이판승에 비해 사판승은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이 많다. 몇 해 전, 어느 사찰에서 사판 소임을 맡았을 때였다. 읍에 사는 신도들이 일종의 민원 비슷한 사항을 가지고 찾아왔다. 절에서 건물을 신축하고 보수하는 데 이왕이면 불자가 운영하는 사업체를 이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다소 굳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다른 종교인들은 서로의 가게를 이용하면서 단합이 잘 되는데 불교는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왜 우리 절은 교회 다니는 사람의 ..
두 달에 한 번꼴로 찾아뵙는 선생님이 있다. 회의 비슷한 모임인데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꼴사납게 돌아가는 세상사에 ‘맵고 짠 양념’을 치면서 딴 세상을 꿈꾸는 자리다. 선생님께서 칠순에 가까워지면서 화제가 조금 바뀌었다.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 신호가 난다는 말씀을 자주 꺼내신다. 평생을 영문학자로 사셨고, 그 절반 이상을 잡지 편집에 바치셨다. 나는 진작부터 선생님을 ‘세계적인 1인 미디어’라고 불러왔다. 멀리서 보면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문학자이지만, 속내는 젊은 시인 못지않게 여리시다. 약자나 소수자는 물론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연민과 연대가 한없이 넓고 깊으시다. 시 씁네 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번 인사동 밥집에서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귓전을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