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사학 동국대가 학내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연임이 유력했던 전임 김희옥 총장이 조계종 종단 고위층의 부당한 압력으로 중도 사퇴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후 이사회는 사찰 문화재 절도 의혹이 제기된 일면 스님을 새 이사장으로 선출한 후 연구부정 행위가 확인된 교수인 보광 스님을 총장으로 뽑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교수와 동문의 단식 등 반발이 이어졌고,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50일 가까이 대학광장 조명탑 위에서 홀로 농성 중이다. 사학의 전횡을 볼 때마다 대학의 주인은 과연 누구냐는 물음이 떠오른다. 국공립대학의 주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이며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한국 대학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은 어떠한가? 큰 뜻을 품고 토지와 건물을 기부한 설..
몇 달 전 어느 재단이 주최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다. 그 재단의 지원금을 받는 민간단체 실무자들이 사업성과를 공유하는 워크숍이었고, 앞부분에 이사장의 인사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행을 맡은 실무자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사장은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30분 정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말씀하시는데 끊을 수도 없고 매번 난감하다고 실토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장은 그 재단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러 가지 자료까지 곁들여가며 거의 강의를 하다시피 했다. 다행히(?) 20분 만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재단인 만큼 지루함을 내색하지 못하고 묵묵히 경청했지만, 실무자는 미안함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장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꿋꿋하게 말을 이어..
지금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자 당사자이다. 지리멸렬한 야권은 비판하기조차 민망하다. 언론 또한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의 입맛대로 대립과 싸움을 부추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할 시행령을 내놓은 정부, 권력의 속셈대로 유가족에게 지급될 돈의 액수부터 외워대는 언론, 그리고 인양을 반대하는 이유는 건져낸 배 안에 실종자 시신이 없을 경우의 허망함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여당 의원의 발언은 글로 옮기기조차 불편하다. 불의 앞에 솟구치는 분노는 증오와 엄연히 다르다. 의롭지 못한 자들은 분노와 증오의 구분을 교묘히 흐리면서 분노의 원인을 숨기려 든다. 그러나 분노가 불의를 물리치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분노에 머무는 순간 맹목적인 미움으로 ..
최근 서울에서 땅꺼짐(싱크홀) 현상이 빈발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내려앉아 지나가던 준설용 차량이 옆으로 쓰러졌고, 오토바이가 웅덩이에 빠지는가 하면 길을 걷던 남녀가 3m 깊이의 땅속으로 돌연 사라지기도 했다. 상하수관의 손상과 무분별한 굴착공사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노후화와 공동화(空洞化)가 이제 곳곳에서 땅꺼짐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당장 불편한 것이 없으니까 뒷전으로 미뤄놓고 실적이 곧바로 드러나는 정책에만 매달려온 결과다. 몸에 비유하자면, 골다공증과 혈관 파열 증세를 방치하고 피부 미용과 보디빌딩만 해온 꼴이다. 땅만 꺼지는 것이 아닌 듯싶다. 국가의 제반 시스템이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지고 있다. 비효율과 무책임, 그리고 부정부패로 인해 ..
지난달 하순, 서울시민대학 봄 학기가 시작됐다. 시민대학 캠퍼스는 여러 곳이다. 서울시청 신청사(시민청)와 은평학습장 그리고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등 9개 권역별 연계대학이 있다. 캠퍼스별로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된다. 내가 담당한 강의는 ‘나를 위한 글쓰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수강생도 다양하다. 팔순 할머니에서부터 은퇴자, 직장인, 휴학 중인 대학생, 전업주부 등 30명 남짓. 글을 쓰겠다는 열정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지만(각자 출석부에 서명을 한다) 나는 일부러 성명을 부른다. 수강생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근 50년 만에 처음으로 출석 체크를 한다며 감개..
열흘 전 학교 측의 일방적인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안’을 성토하는 중앙대의 긴급 토론회에 토론자로 불려 나갔다. 갑자기 시설 사용허가가 취소되어 오후 4시 행사는 정문 앞 길가에서 열렸다. 해가 곧 기울자 참석자들은 이른 봄의 쌀쌀한 바람에 떨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찬 시멘트 바닥에 앉아 두 시간을 꼼짝 않고 귀를 기울이던 진지한 학생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학과 폐지와 단과대학별 신입생 모집이라는 극단적 계획을 학장들에게도 발표 전날에야 알리는 중앙대의 밀실 행정은 요즘 대학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중앙대 사태는 특정 대학이 아니라 전국 대학을 휩쓸고 있는 갈등의 일각이다. 그 뒤에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이 버티고 있다. 토론회 이튿날 교육부, 중앙대 법인, 이..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또다시 펴서 손뼉 치고 두 손을 머리 위에 햇님이 반짝 햇님이 반짝 햇님이 반짝 반짝거려요.’ 오랫동안 애창되어온 이 동요는 율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몸으로 기억되는 멜로디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가로도 유명한 이 곡은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작곡했다.) 가사에 나오는 단순한 동작들은 아이들에게 신체의 경쾌한 리듬을 일깨워준다. 한국의 ‘곤지곤지 잼잼’ 같은 전통 육아놀이는 거기에 더해 애착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 손은 작지만 매우 특별한 신체 부위다. 장애를 입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불편한가를 생각해보자. 발과 다리를 쓸 수 없게 되면, 목발이나 휠체어로 보완할 수 있다. 설령 걷지 못한다 해도 책상 앞에 앉아서 비장애인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 반..
“스스로 자(自) 자의 기원이 뭔지 아세요?” 영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영문학자는 자기 코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코입니다, 바로 이 코.” 믿기지 않았다. 모임의 뒤풀이, 농담이 오가는 자리여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다. 다음 날 한자의 기원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가 간밤의 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맞았다. 자(自)의 갑골문 자형은 사람의 코를 본뜬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신을 가리킬 때 손으로 자기 코를 가리킨다고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영문학자는 말했다. “얼굴 중에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권은 그 다음이었다. “문제는 자기 코가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전날 밤 그랬듯이 내 두 눈은 내 콧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