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일이 있어 여의도에 갔다가 나이 드신 분들(이하 어르신)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봤다. 종북세력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때 든 생각은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구나’였다. 갑자기 3년 전 대선 투표 때의 일이 떠올랐다. 투표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놀러 갈 생각에 아침 일찍 투표장에 갔는데,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사는 천안이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해서 그런지, 그 대부분은 어르신들이었다. 흰옷을 입은 채 차례를 기다리는 그분들의 얼굴은 무료해 보였다. 선거 때마다 어르신들은 연령대별 투표율에서 늘 1, 2위를 다툰다. 2012년 대선 때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80.9%로 전체 투표율을 가뿐히 넘겼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70대 ..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에서 해킹장비를 샀다. 장비를 판 회사 직원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은 자신들에게 “카카오톡 감청 기능을 추가해달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국정원은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등 정치공작을 벌였던 전력이 있다. 사정이 이러니 여론조사 결과 “내국인 사찰도 했을 것”이라고 믿는 이가 52.9% 나온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국정원 주장대로 “대테러나 대북공작 활동을 위해서만 해킹했을 것”이라고 응답한 분들도 26.9%나 됐다. 이분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중 일부는 세상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밀문서를 줄줄 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 2..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12월13일,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홍준표는 편지 한 통을 공개했다. “나의 동지 경준에게…. 자네가 큰 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라네.” 홍준표에 따르면 이 편지는 김경준과 같이 수감생활을 한 신경화가 김경준에게 보낸 것으로, 김경준이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BBK 대표였던 김경준은 주가조작으로 미국으로 도망간 상태였는데, 대선을 앞두고 그가 귀국한 것은 BBK를 자신이 설립한 것처럼 얘기하고 다녔던 이명박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경화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결국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로부터 4년 뒤, 신경화의 동생이 ..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싸움의 승패를 따지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잘못을 누가 더 많이 했는지와 무관하게 먼저 사과하는 쪽이 패자였다. 어른들은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철학적인 얘기를 하곤 했지만, 또래들이 보는 앞에서 “미안해”라고 하는 건 정말 모양 빠지는 일이었고, 그 어른들도 막상 자신들이 싸울 땐 일절 양보가 없었다. 둘째, 울면 지는 거였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겁을 먹었거나 싸운 것 자체를 굉장히 후회한다, 이런 의미로 해석이 됐으니까.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대통령께서 ‘연승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을 보자.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은 특별위원..
“추신수 때문에 졌다.” 미국 야구팀 텍사스의 배니스터 감독은 경기가 역전패로 끝나자 기자들을 불러 추신수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떠들었다. 4-2로 리드하던 8회, 추신수가 자기 앞으로 날아온 타구를 쓸데없이 3루로 송구하는 바람에 동점의 빌미를 만들어줬다는 것. 추신수의 플레이가 그리 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졌다는 말엔 수긍하기 어려웠다. 뜻밖의 질책에 추신수는 화가 났고, “그렇게 잘하면 감독이 직접 글러브를 끼고 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감독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추측을 하자면 이렇다. 배니스터는 올해 텍사스 감독으로 부임한 초짜 감독이다. 팀을 잘 이끌어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마음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야 할 추신수가 너무 못한다. 4월 한 달간 타율은 1할이 ..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덥지 않았다. 정부의 대응이 완벽해서 첫 번째 감염자 이외에 메르스 환자가 더 나오지 않았다면 다들 메르스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았겠지만, 국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용납하지 않는 정부 덕분에 초등학생들조차 메르스를 입에 달고 사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초동 대응이 잘못됐다”며 사과한 걸 보면 국민들의 알 권리 차원에서 일부러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킨 건 아닌 모양이다. 현재 문 장관이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고 있는데, 이게 꼭 그만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석·박사도 모두 경제학으로 받은, 그 후 보건과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에서만 일해온 문 ..
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에는 총리가 없었다. 이완구 전 총리가 고 성완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위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후임을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총리 후보자가 되면 인사청문회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니 말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들어서 총리 후보가 된 이들 중 세 명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낙마했다. 그 바람에 세월호 사건 이후 사표를 낸 정홍원 총리는 바통을 넘길 사람이 없어 열 달이나 더 현직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이번에 새 총리로 지명된 황교안씨도 청문회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야당에서 황씨가 공안검사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현 정부가 공안통치에 나서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것”이라며 반대하는 데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고, 아들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전 국민 기생충 감염률이 80%를 넘나들었다. 거리에서 약을 팔던 약장수들이 구경하던 아이 한 명을 무작위로 불러내 회충약을 먹이면, 그 아이의 항문에서 회충이 떼거지로 배출되곤 했다. 같은 반 아이들 중 상당수가 기생충에 걸려 약을 먹어야 했지만, 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양성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때는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겐 장차 기생충학자가 될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도망칠 생각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전 국민의 80% 이상을 삼켰던 기생충도 감히 내게는 들어올 생각을 못했으니까. 나뿐 아니라 다른 기생충학자들도 기생충에 걸리는 경우가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적은 듯하다. 어쩌다 감염사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