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자제’, 가수 조영남씨의 화투 그림 대작(代作) 사기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확정하면서 사용한 언어다. 사법통치(juristocracy)와 사법 과잉이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 시의적절한 원칙 선언이자 경고의 메시지다. 앞으로 끼어야 할 데만 끼겠다는 사법부의 다짐으로 들린다. “미술 작품 거래에서 기망 여부를 판단할 때 위작 여부나 저작권에 대한 다툼이 있지 않은 한 가치 평가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 원칙은 비단 예술이나 문학작품의 표절 시비, 친일 역사 논쟁 등에 한정되지 않아야 한다. 정치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과 사법의 손을 빌리는 형사사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에 던지는 경고장이어야 한다. 고소장을 들고 검찰청으로 달려가고..
21대 국회가 4년의 대장정에 올랐다. 임기 시작과 개원일은 법에 정해져 있어 닻을 올리긴 했으나 언제 등원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국회 문은 아직 닫혀있어 행정부나 사법부 소속 공무원이 임기 시작과 동시에 일터로 출근해 본연의 업무를 시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최대 의석 차 여대야소의 입법 지형이 다를 뿐 국회 개원 언저리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다. 개원을 앞두고 여야가 상임위원장 배분을 두고 벌이는 대치국면과 지각 개원 우려는 익숙한 풍경이다. 여야 모두 20대 국회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를 쓰고도 최악이라는 오명을 받은 만큼 일하는 국회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180석의 여당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개혁 입법에 박차를 가할 것이고 쪼그라든 야당은 존재감을 드러..
, 30년 전 성폭행범의 혀를 깨물어 위기를 모면한 주부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놀랄 일은 아니지만, 성폭행 피해자는 오히려 과잉방위로 기소되고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다행히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대법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었다. 여성의 성과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된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이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를 당해도 싼 부도덕한 여자로 몰아세우고 여성의 인권보다 혀 잘린 성폭행범 청년의 구만리 같은 앞길을 걱정해 주는 등 한국 사회의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당시 피해자의 마지막 대사는 현재의 성범죄 피해자를 그대로 대변한다. “재판장..
세계적 재난도 견디기 어려운데, 그 와중에 터진 반인륜적 범죄가 우리를 충격에 빠트렸다. 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로 서로를 고립시키더니 퍼질 대로 퍼져버린 반인권적 범죄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켜 버렸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선언한 헌법국가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조두순’을 넘어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웰컴 투 비디오 그리고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까지 끊이지 않는 추악한 범죄가 이제 음지로 파고들었다. 아동 성폭행범의 대명사 ‘조두순’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성폭행·강제추행이라는 전통적 젠더폭력에서 성착취 영상을 제작·유통·소지하는 새로운 ..
‘기생’은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삶이다. 공생처럼 보이지만 다른 생물의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얹혀살이 관계다. 우리는 남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기생충 같은 놈’ ‘빈대 붙지 말라’고 힐난한다. 자립할 의지도 생각도 없는 것이라면 어디든 기생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 독자적인 노선도 정책도 없고, 선거 공약도 없이 다른 정당 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활용하면 기생충과 다를 바 없다. 기생정당이다.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의 관계가 그렇다. 전자가 숙주요, 후자가 기생생물이다. 기생의 티는 강령과 당헌에 그대로 드러난다. 비례대표 의석 확보용으로 급조한 정당이라 강령은 대여섯 줄에 불과하고 당헌에는 목적 조항도 빠져 있다. 한 줄짜리 비전과 몇 줄의 강령으로는 당의 이념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시점이 문제다. 그 의도가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하필 살아있는 권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두고 기존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부터 법무부가 공소장 제출 거부와 비공개를 결정한 것인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대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공소장 원문이 아니라 공소사실의 요지자료를 제출한 근거로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들지만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는 법률체계상 상위규범인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법무부의 비공개 결정이 국회와 법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국민적 관심이 ..
인사를 당했다. 인내심의 임계점에 달한 인사권자의 강력한 견제구이자 경고다. 이번 검찰인사를 두고 ‘자업자득, 수사방해를 위한 보복인사, 또 다른 길들이기’ 등 다양한 관점과 반응이 혼재한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간 국민을 갈라놓고 혼미하게 만든 검찰의 칼춤을 멈춰 세워야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필요하고도 시기적으로 적절했으며 당위성 있는 인사권 행사다. 무소불위의 검찰을 독립성 보장이라는 이유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임명권자의 직무유기다. 검찰수사의 중립성을 위해 정치권력은 삼가고 절제해야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비정상으로 내달리면 선출된 권력에 의한 적절한 민주적 통제는 불가피하다. 검찰의 독단을 막기 위한 최후 수단이다. 적폐수사로 날개 단 검찰은 검찰..
적폐청산에 동원된 대표적 범죄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다. 국정농단과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기소된 이가 전직 대통령과 사법부 수장을 포함해 십 수 명에 이른다. 사실 직권남용죄는 기소건수나 유죄가 인정된 사례가 적다는 점에서 잊혀진 범죄유형이다. 기소도 2~3%에 불과하고 유죄판결을 받는 공무원도 거의 없었다. 과거 정권교체기마다 반짝 등장한 적이 있지만 이번 적폐수사처럼 검찰이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지는 않았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이 서슬 퍼런 칼날을 세웠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본격화되면서 직권남용죄의 고소·고발이 폭증했다. 연평균 5000~6000건에 불과하던 고소·고발 건수는 2017년 들어 9741건, 지난해에만 1만4345건을 기록했다.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