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 정책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자행한 폭력과 닮았는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만평이 매일신문 3월18일자에 실렸다. 만평을 그린 모 화백은 지금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말이다. 폭력을 옹호하거나 피해자를 모독할 뜻은 없었으며, 그저 현재의 ‘안 좋은 것’을 과거의 ‘안 좋은 것’과 연결해 놓았을 뿐이라고, 즉 악의는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잘못은 악의가 아니라 무지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유를 두고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타고나는 능력’( 22장)의 소산이라 드높인 것은 그만큼 비유가 성공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만평은 실패한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이 ..

환하다. 따뜻하다. 눈부시다. 봄이 오면 가장 크게 변하는 건 햇빛이다. 햇빛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그것을 모두 그것으로 만들어준다. 산에 들어가서 숲, 강에 뛰어들어 강물, 바위를 만나면 고대의 침묵을 빚어낸다. 물오른 물참대 가지처럼 빳빳하게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걸어간다. 낙엽은 제 본래의 모양과 색을 모두 버렸다. 세상에게 받은 것은 고스란히 세상한테 돌려준 뒤 지하로 녹아드는 잎들의 최후. 경북 경주와 포항의 한 경계인 운제산 산여계곡. 운제(雲梯)는 구름의 사다리이다. 원효, 의상, 자장, 혜공. 숱한 고승들이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수행할 때 구름을 사다리 삼았다는 뜻을 살린 이름이다. 혼자 특출하게 높은 산은 없고 모두들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형제들처럼 봉우리와 능선이 죽 이..
수사권을 지키려고 정치적 수사(修辭)만 내뱉은 검찰총장의 사직서였다. 반성은 없고 반발만 드러낸 사퇴의 변이었다. 과연 검찰이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을 파괴해 온 숱한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피해로 고통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어렵게 쌓아올린 정의와 상식을 무너뜨린 건 오·남용한 검찰권 아니었던가. 검찰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해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낯뜨거운 퇴임사다. 군부독재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국정농단 사태를 기억해 보자. 권력의 사유화로 파괴된 민주주의와 법치를 살려낼 기회를 걷어찬 검찰이었다. 미적대다 마지못해 수사하는 시늉만 내다가, 결국 언론과 특별검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보수정권에서 그러했다.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엎..

늦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섰다. 고향과 절은 저물어가는 저녁에 닿는 것이 좋다지만 마음이 좀 급해졌다. 국도에 접어들어 급격한 각도로 몇 번 핸들을 꺾다 보니 방향 감각이 마구 헝클어졌다. 이렇게 모르는 상태, 그게 좋았다. 산 그림자가 길게 덮치는 길에 드디어 이정표가 나타났다. 한 고개를 넘었더니 아연 기린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봉우리가 딱 버티고 서 있다.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어젯밤 읽은 의 한 장면 속으로 미끄러지는 듯 기이한 느낌이 일순 휩싸고 돌았다. 과연! 작은 인각사. 나의 기대에 견주어 현장을 보고 초라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너무 빠르게 왔다. 오전에 출발해서 오후에 도착한 것이다. 질펀한 속세의 꼬리를 주렁주렁 그대로 달고 와서 절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최근 사회학자 이철승의 를 읽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이사 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미국인들은 가족 몇이서 천천히 며칠 동안 이사를 가지만, 유학생들은 협업을 통해 이사를 일거에 진행한다. 이사하는 학생이 미리 이삿짐을 포장해 놓으면, 이사 당일에 유학생들이 몰려와 짐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옮겨가며 순식간에 차량에 싣는다. 이사 가는 학생은 간단한 배달음식 등으로 동료들을 대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 이사 갈 때 일손을 보태야 하는 것도 일종의 ‘국룰’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 유학생들의 ‘이사 풍습’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본다고 한다. 전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회자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세계가 변화하는 흐름을 지체되지 않고 함께 체험..

2021년이 열리고 벌써 한 달하고도 열흘이 흘렀다. 신축년은 이제야 비로소 밝았다. 둘을 구분해야 하는 건 작년에 배웠다. “요즘 경자년, 쥐의 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경자년이 되려면 아직 20일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는 육십갑자의 기준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기 때문이다.”(엄민용, ‘말글 나들이’) 2021년과 신축년. 격을 갖추고 때에 맞게 둘을 호명하니 나무의 가지와 줄기, 풀의 꽃과 잎을 구별한 듯 마음이 개운하다. 어린 시절 그렇게 설레게 기다렸던 설이 어느 때부턴가 시무룩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올해처럼 이렇게 싱겁게 넘어갈 줄은 미처 몰랐다. 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구부리는 동작을 만들지 못..
급기야 ‘K신파’라는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한국영화가 ‘눈물을 짜내는 플롯·연출’에 의존한다는 힐난이 담겨 있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가 싫다는데도 생산이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지 않을까. 싫다는 사람이 시장에서 소수이기 때문이다. 신파는 한국의 대중서사 소비 집단을 다수파와 소수파로 구획하는 기준이 된 것 같다. 신파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 특히 소수파의 거부감이 심한 소재는 ‘부모의 희생’으로 보인다.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의 본의 아닌 공통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러 질문이 발생한다. 첫째, 한국영화에서 부모들은 왜 희생되는가. 둘째, 왜 다수의 관객들은 그것을 기꺼이 용납하는가. 셋째, 소수의 반대자들은 누구인가. 한국영화에서 부모가 자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실..

2월, 학년이 올라가고 교실을 이동하는 시기.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되는 슬픔이 왔다. 정든 짝꿍과 헤어지는 와중에 새 교과서를 받는 은밀한 즐거움도 있었으니 국영수는 뒤로 미루고 체육과 미술, 지리부도를 즐겨 보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각종 신기록의 육상선수들과 알타미라 동굴 벽화. 모든 학창 시절을 청산하고 넥타이 매고 사회로 진입할 땐 여기도 한 동굴이 아닐까, 아득하고 캄캄했다. 남산터널에 버스가 갇힐 때도 있었으니 시계를 보고 창밖을 더듬으면 차의 꽁무니가 휘갈긴 치졸한 낙서뿐이었다. 어느 해 여름휴가에 접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수승한 그림들. 이런저런 자료와 체험을 바탕으로 짧은 글을 끄적여 보았다. 한 줄기 빛이 찾아드는 순결한 동굴. 마지막 점을 찍은 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