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SNS를 뜨겁게 달군 ‘심심한 사과’ 논란에 뒤늦게 한마디를 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진단과 공감이 가는 비판을 내놓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논란의 배후에 있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징후가 눈에 걸려 사족이 될 것을 무릅쓰고 몇 마디를 얹는다. 시작은 서울의 한 카페가 웹툰 작가 사인회를 연기하면서 예약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표현을 쓰면서부터였다. ‘심심한 사과’를 ‘심심하다’는 뜻으로 오독한 예약자들이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는데, 예약자들이 자신들의 어휘력 부족과 무지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그런 어려운 말을 쓴 상대를 비난한 것이 논란을 키운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
더블린 외곽에 중년의 한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살아간다. 그의 고상한 취미는 책 읽기와 음악당 가기. 한 여자를 알게 되어 가까워지지만, 관계는 일방적이다. 남자는 말하고 여자는 듣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그에게 그녀는 글을 써 보라고 격려하고 위로한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자, 그는 이별을 통보한다. 4년 후, 남자는 여자의 부고소식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만, 그녀를 서서히 기억에서 지우고 자신에게 퇴각한다.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1914)의 ‘가슴 아픈 사건’에 나오는 더피와 시니코 부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왜 자신을 사랑한 그녀의 아픔을 볼 수 없었을까. 그는 왜 폭력적으로 이별해야 했을까. 그는 왜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슬프지 않았을까..
받는 일은 기쁜 일이다. 칭찬을 받는 일도, 상을 받는 일도, 선물을 받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니어서 더 그렇다. 뜻밖의 경우일 때가 많아서 놀라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 또한 기쁨을 더욱 벅차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그러나 받는 일도 쉬운 것만은 아니다. 정도가 지나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ㄴ게 된다. 이걸 받아도 될까, 이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하는 생각은 짐이 된다. 부담이 된다. 주고받는 일은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넬 때 신경을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대의 취향은 물론, 그가 하고 있는 일이나 가족의 형태 또한 고려해야 한다. 대가족이 사는데 케이크 한 조각을 보내는 것은 주면서도 겸연쩍은 일이고,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스테..
환자가 되었다. 검진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는데 본격적인 치료는 지루함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주사를 맞지 않아도 진통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고 병실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루틴을 찾았다. 매일 하는 각종 기본 검사를 마치면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과 가운을 입고 병원 안을 걷는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때 편의점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사서 병실로 돌아와 그것을 마신다. 걷는 것은 지금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의식과 같아서 갑작스러운 외부 검사 일정이나 컨디션 문제로 걷지 못하게 되면 하루 종일 좌절감에 빠진다. 처음엔 대학병원의 구석구석을 걷는다는 게 그저 좋았다. 침대를 벗어나 의사, 간호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러나 증축과 보수를 거듭해 거대한 미로가 된 병원을 매일같이..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옛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철학과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모든 학과가 수강하는 교양과목이었지만 대학 첫 강의인 데다 철학 전공생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렸다. 마침내 뚜벅뚜벅 강단에 선 교수는 첫 마디로 교탁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이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강의실 안의 그 누구도 다 다른 형태로 교탁을 보고 있고, 고개를 돌리면 교탁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교탁’이라 부를 수 있으며, 도대체 교탁이란 것이 지금 여기에 있기는 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나중에야 그 질문이 우리 인식의 불확실성을 묻는 철학의 오랜 방식임을 알았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간 내가 믿던 것이 송두리째 무너..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고 떠났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욕망하지 않는다. 남겨진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헤어진 순간 그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더군다나 그 사랑이 그녀의 전부라면? 한국에 밀입국하고 나이 많은 폭력적인 남편과 살아야 했던 중국여성 서래(탕웨이)의 밑바닥 인생은 철저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 준 친절한 형사 해준(박해일)을 만나 사랑을 알아버렸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은 산에서 발생한 변사사건을 수사하게 된 해준이 사망자의 부인 서래를 의심하고 동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는 형사와 피의자 사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해준이 헤어질 결심을 하고 떠나지만, 서래는 사랑할 결심을 하고 그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렇게 물었으나 걸어서 왔는지, 차를 타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도 알 바 아니다. 지금은 내 눈앞에 상대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문득 생각나서. 생각이 나서 왔지.” 방문자는 천천히 대답한다. 그제야 마음에 평정이 깃든다. 용건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마음이 다친 날에는 종종 저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생각이 나서 왔지”라고 차분하게 말했던 사람의 표정을 그려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응어리가 눈 녹듯 풀어지는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날 수는 있다. 생각이 났다고 가볍게 문자를 보내거나 애틋한 편지를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난 사람을 보러 가기는 쉽지 않다. 문 밖으로 나가거나 옆 동네를 산책하는 데에도 ..
이 사회는 정말로 중병이 들었나보다. 뉴스를 보거나, SNS에 올라온 글과 사진을 보거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흔한 행동거지를 볼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런 징후를 느끼곤 한다. ‘질병’이나 ‘진단’과 같은 의료적 용어로 사회문제를 병리화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으나, 나는 곳곳에서 마주치는 이 사회의 물리적·심리적·윤리적 퇴행의 징후들을 보면서 ‘병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자전거 출근길에 있었던 일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인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기다리는 다른 자전거에게 “약간 비켜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 충고를 했다가,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큰 싸움이 날 뻔했다. 그의 자존감은 이 정도 말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강고하거나 아주 허약한 것인가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