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따뜻하고 배려심 많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남을 무시하고 위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평소의 기대와 달라진 모습을 접하고 나면 오랫동안 맺어온 인간관계가 무너지기 십상이고, 그렇게 틀어진 관계는 회복되기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의 정서에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치명적인 일일뿐더러, 그 주어진 지위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리다 보니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귀가 막히거나, 쇄도하는 민원 혹은 근거 없는 비..
“알아야 면장을 하지.” 면장(面長) 노릇을 하는 데에도 식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와전되어 사용되는 속담이다. “배우지 않으면 장(牆)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면장(面牆)’이 무지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여왔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면면장(免面牆)’이 ‘면장을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牆)은 보통 담벼락으로 풀이되는데,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세워둔 가림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깨달음을 위해 좌선하는 선사가 아니고서는, 앞이 꽉 막힌 곳에 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면장을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자신의 눈앞에 가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림막에 막혀 ..
말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졌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흔히 ‘표변(豹變)했다’고 한다. 이 말은 본디 표범이 가을에 털갈이하는 것처럼 허물을 고쳐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원 출처인 주역 ‘혁괘(革卦)’에서는 ‘혁면(革面)’과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겉 표정만 바꾸는 혁면과 달리 표변은 전면적인 변혁을 뜻한다. 주희의 주석에 의하면 이 둘은 모두 ‘대인호변(大人虎變)’의 결과다. 통치자가 바르고 알맞은 도리로 개혁을 단행하면 천하의 모든 사리가 호랑이 무늬처럼 선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난다. 그 영향으로 선량한 이들은 온전히 교화되고 이기적인 이들조차 적어도 겉으로는 교화를 좇는 사회가 된다는 맥락이다.주역의 순서상 혁괘는 정괘(井卦)의 다음에 온다. 우물은 그대로 두면 더러워지고 수시로..
아이들의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가 자전거 타기다. 세 발, 네 발 자전거만 타던 아이가 보기에, 두 바퀴 위에 앉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능력이다. 나 역시 처음 두 발을 땅에서 떼고 페달을 밟는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다시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도 선 채로 균형을 잡을 순 없어. 일단 밟아!”판문점 회동을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깜짝쇼를 연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상황에 따라 표변하며 백척간두의 줄타기를 이어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 사이에서 한발 물러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 예기치 못했던 역사적 전개에 감격하는가 하면, 실제 성과도 없고 외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 것이 올바를까? 사람은 습지에 오래 살면 반신불수가 되고 나무 꼭대기에 머물면 벌벌 떨지만 미꾸라지나 원숭이는 그런 곳이 더 편안하다. 사슴은 풀을 뜯어먹고 지네는 뱀을 먹어치우며 솔개는 쥐를 잡아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만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널리 알려진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올바름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그렇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미인이라 해도 물고기나 새, 사슴에게는 그저 도망쳐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두고 장자는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아름다운지 묻는다.창의와 융합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양하게 개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는 기반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
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는 황달은 간염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담즙 색소의 하나인 빌리루빈이 간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리루빈이 과다하게 쌓이면 청력 장애나 뇌성마비 등의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루빈을 완전히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적당량의 빌리루빈은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암과 치매 등 치명적인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이 유해산소 역시 체내의 세균 대사를 위해 소량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비밀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우리 몸뿐만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와 의미를 지닌다. 미생물부터 포유류까지 수많은 먹..
옛사람들은 영욕(榮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노생이 한단에서 꾼 꿈이 오래 회자되어 온 것도 영욕의 부질없음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재상의 영예와 역적의 치욕을 번갈아 겪으며 80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나 보니 조밥이 채 익기도 전이더라는 이야기다. 영욕이란 이처럼 잠깐 들었다 깨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치욕을 피하고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과 욕을 낮과 밤, 추위와 더위처럼 그저 지나가는 자연현상처럼 여겼다는 일화가 숱한 제문과 비문에서 칭송의 문투로 사용되어 온 것은, 영욕에 초탈한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순자(荀子)는 영욕이야말로 성왕이 내세운 기본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과 욕을 의영(義榮)과 ..
말의 인플레이션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표현은 더 과격해지고 공허한 피로와 혐오가 쌓여간다. 정치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이 된 SNS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보면, 이성이 마비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대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날선 표현도 문제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개념의 사용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실질과 너무도 달라서 도무지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법한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며, 실소와 분노를 넘어 의아심이 생긴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있다.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사실로 믿게 된다는 점을 비유로 경계한 말이다. 고사의 출처에 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