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구경한 가을 운동회 학부모 춤판은 볼만했어. 단풍이 든 교정 귀퉁이에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같이 술을 자시고 급기야 춤판을 펼치셨는데, 기진맥진한 아부지들을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모셔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버스 여행을 떠난 동네 아짐들의 춤바람도 재미있었지. 방뎅이를 사정없이 휘젓는 버스춤은 쿠바의 살사나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시기와 맞먹는 수준급 ‘토종 무용’이렷다. 읍내 동네에선 춤바람이 나설랑 가정을 버리고 순회공연(?)을 다니는 엄마 아빠가 한두 명쯤 꼭 있었다. 그래도 화투 놀음에 빠져 집을 버린 것보단 나은 케이스. “새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
나이를 지긋이 드신 분을 외국말로 ‘시니어’라 하는데, 내 마음 같아선 ‘신(god)이여’. 거의 하나님 천주님급. 최근 재밌는 책을 선물받았는데, . 11명의 시니어가 펼치는 삐뚤빼뚤 고민상담 들어주기. 노자 왈 맹자 왈 깨달은 도사들의 답변이 아니어서 반가웠다. ‘신이여’들은 식사 후에 믹스 커피를 즐기는 특징. ‘재미없고 무기력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친구들하고 자주 만나라’, ‘행복하게 나이 들고 싶어요. 방법이 있을까요? 답: 행복하게 살려면 1. 건강하게 산다 2. 마음을 비운다. 3. 남과 잘 소통한다’, ‘침대에서 나오기 너무 힘들어요. 답: 그대로 자라’, ‘남자친구가 왜 안 생길까요? 답: 눈을 딱 뜨고 계속 찾아라’. 요즘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젊어졌다, 어려졌다, 연애하..
불멍이 대세인데, 풀멍도 있지. 마당의 풀을 보며 멍때리기. 풀꽃이 필 때쯤이면 더는 풀이 번성하지 않아. 풀깎기, 풀뽑기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가을볕을 쬐며 눈알을 끔벅끔벅하면서 풀멍. 그간 땡볕을 피해 다녔는데, 사람이 간사하지. 은은한 볕이 이젠 반갑고 좋아라. 저녁에는 달을 보면서 달멍. 한 스승이 있었는데 제자들에게 ‘달을 달로만 그저 바라보기’를 주문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한 제자가 묻자, “며칠 굶은 사람은 달이 떡으로 보이게 되고, 사랑에 푹 빠진 자는 연인의 얼굴로 보이기 마련이다. 제대로 보려면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단다.” 지인 중에 멍때리기 대회를 창시한 교주에 가까운 여동생이 있는데, 이름은 웁쓰양. 얼마 전에도 친구들과 멍때리기 대회를 했다. 멍때리기에선 무조건 웁쓰양이 킹왕짱..
강원도에 가면 놓칠 수 없는 음식, 막국수를 ‘막국시’라 불러. 메밀국수는 ‘메물국시’, 또는 ‘느릉국’이라고도 한대. 손칼국수는 ‘가수기’라 하는데, 타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막국수란 막 부서지고 막 먹어 해치우는 국수. 메밀의 가장 얇은 겉껍질만 벗기고 빻아 만든 메밀가루. 이를 반죽해 뽑은 거무튀튀한 면발. 식당에 가면 “아주머이! 여기 마카 막국시~” 그런다. ‘마카’는 강원도 말로 모두란 뜻. 친구 셋이 커피가게에 가서 “마카 커피요”이렇게 주문을 했는데, 모카 커피 석 잔이 나왔다는 ‘설’. 아무리 국수라도 막 먹다가 체하는 수가 있지. 스님도 아닌데 국수라면 무조건 콜, 체할 만큼 환장을 하는 편이다. 멸치국수 골목까지 있는 담양에 사는 것도 다 이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 요새..
어젠 올해 들어 할아버지가 된 두 분과 식사했다. 할아버지가 되면 손전화기 바탕화면이 손주로 바뀜. 또 수시로 사진첩을 뒤적이며 자랑대회. 머잖아 젖니가 나고, 앞니가 쏙 빠질 미운 일곱 살쯤 되면 얼마나 귀여울까. 젖니로 깨물다가 늙으면 의치 틀니로 살게 되는 게 인생이야.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인생은 후딱 지나간다. 군내버스 운전사 바로 뒷좌석에 앉은 할매가 “입이 궁금하믄 이거 조깐 드실라요?” 하면서 아몬드를 한 주먹 주더래. 운전수가 맛있게 얻어먹다가, “아슴찮이(고맙게) 이리 맛난 걸 주시는가요. 근데 할머니는 치아가 아직 성성하신가 봅니다잉. 아몬드를 깨 자실 만큼.” 할머니가 픽 웃으시더니 “그거이 그게 아니고요. 초코릿은 맛나게 핥아 묵고, 속에 댕긴 고거는 딱딱해서 못 묵겄습디다. ..
아프리카는 인류의 원조. 악기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대부분 아프리카야. 북미 중서부 지방 ‘컨트리 뮤직’에서 즐겨 사용하는 ‘밴조’는 소리가 찰랑찰랑. 탬버린을 뻥튀기한 몸통을 지녔지. “멀고 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밴조를 메고 나는 여기 찾아왔노라…” 흥얼대던 노래 ‘오 수잔나’. 흑인 노예들은 고향에서 쓰던 악기를 개량해 오늘의 밴조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말리에 가면 ‘은고니’란 악기가 있어. 연주자도 조율하는 데 반나절이 걸리지. 밴조의 조상이 바로 은고니다. 아이들이 좋아해 배우는 손가락 피아노 ‘칼림바’. 섬나라 원주민들이 해변에서 둥당둥다당 노래해. 원래 이름은 ‘음비라’로 아프리카 짐바브웨가 고향이다. 음비라는 고전 피아노의 조상 격이 된다. 한번은 브라질엘 갔다가 음비라로 노래하는 ..
요즘은 세상만사 온갖 게 다 자극적이야. 고추를 먹어도 청양고추 그 이상을 바라. 강력 캡사이신 매운맛 소스가 들어간 요리들이 사랑받는다. 청양고추를 다량 손질하다가 손에 화상을 입었다는 말도 들었어. 혀만 아니라 손끝까지 화상이라니. 입맛이 돌면 매운맛뿐 아니라 매운 거 ‘할압씨(할아버지)’라도 오케이겠는데. 맛있는 거 먹자고 하면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 앵두나무 열매가 맺는 봄날엔 앵두의 앵자만 들어도 혀끝에 시큼한 침이 고이곤 했어. 입맛도 같이 돌곤 했지. 뜬금없이 어머니가 해주시던 멸치만을 넣은 김치찌개가 생각나. 텁텁한 고기류를 빼고, 멸치를 우린 시원한 맛의 찌개. 다 먹고 나선 굵은 멸치 꽁다리를 들고 툇마루에 종종대던 강아지들 입 벌리면 넣어주던 풍경. 후배네에 명절이라고 선물 박스들이..
요전날 클래식 음악 공부하는 친구들과 소풍을 갔는데, 같이 간 친구가 현지 회원네 살강에 있는 깨를 꺼내어 요리에 담뿍. 국산 깨라서 씹히는 고소함이 어찌나 진하던지. 텃밭의 깻잎도 따다 전어회를 된장과 함께 싸 먹었다. 아직도 입안에 깻잎의 알싸함이 남아 있는 듯해. 도쿄 조선대의 영양학 교수인 김정숙 샘이 북조선을 다니면서 음식 이야기를 썼는데, 이란 책을 반갑게 읽었다. 무엇보다 북조선의 밑반찬인 깻잎 절임은 된장에 절인 맛이라니 궁금증. 보통 간장과 기타 양념을 얹고 반찬통에 차곡차곡 담아서 수시로 꺼내 밥을 싸서 먹는데, 멀리 해외엘 나가면 통조림에 담긴 걸 사가기도 했지. 김치는 냄새가 배고 부담스러운데, 깻잎 절임 통조림은 간편하고 맛나더라. 반쪽 나라에 여행 갈 땐 가지고 갈 필요가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