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꾸락을 콱 잘라뿌고 싶소.” K는 말했다. 투표 다음날부터 배신당하고 후회하는 시민. 그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잘랐을까. 이번에도 그는 암만 생각해도 찍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열네 명의 대통령 후보 중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 같이 꿈꾸는 이가 정말로 한 명도 없는 건가. 양당체제가 고착된 이후로 당선 가능한 후보와 지지하는 후보 사이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 갔다. 안 찍으면 안 찍었지, 더 나쁜 놈 막으려고 덜 나쁜 놈 찍는 그런 투표 다시는 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투표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질까봐. 하지만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건 손가락을 그렇게 꺾고도 당신이 또 예전과 똑같은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최악을 막겠다며 차악에 투표하고, 그 사람이 싫어서 ..
대선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필자와 같은 헌법학도의 입장에서 특히 흥미로운 공약은 아무래도 유력 후보들의 권력 운용에 관한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통합정부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라는 명칭을 거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인격적 권력 운용을 넘어섬과 동시에 행정권력을 공유하겠다는 다짐이다. 윤석열 후보는 청와대 해체를 약속하고 있다. 청와대라는 명칭에서부터 그곳의 집무실을 하루도 쓰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두 공약 모두 87년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대통령의 권력 축소론의 연장선에 있다. 유력후보들이 대통령 권력 내려놓기에 합의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러한 발상은 자칫 헌법이 설정한 권력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헌법적 검토가 필요하다. ..
주택가가 더 이상 발달하기 어려운 구도심에는 한 학년에 한두 학급 정도로 규모가 작은 초등학교가 꽤 있다. 이런 추세는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심화될 것이다. 앞으로도 학생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은 대전의 한 소규모 초등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구청의 마을교육공동체 지원을 받고 마을교육을 추진하는 초등학교였다. “혹시 학교가 소재한 ○○동에 살고 있는 교사가 계신가요?”라는 질문에 손을 든 교사는 없었다. 범위를 넓혀 ○○구로 질문하니 몇 명이 손을 들었다. 모두 대전에 살고 있었고, 광역이지만 대전에 대한 지역 정체성과 소속감은 공유한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대전과 인접한 충북의 한 군 지역은 교사 대부분이 대전에서 출퇴근한다고 한다. 순환전보제에 따라 학교를 이동하는 교사가 학교 소재..
대선 후보 토론이 두 차례 진행되었지만, 아쉽게도 권력 구조 개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 개혁과 직접 관련 없는 주제들이어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유 주제 등의 시간에서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후보들이 권력 구조 개편에 큰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다. 권력 구조 개편은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할 즈음 단골 주제가 되다시피 했다. 지금도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대선 후보들 주위에서 논의가 실종되고 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도 ‘더 이상 실패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으려면 권력 구조 개편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소신을 재차 피력했고, 박병석 국회의장도 개헌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대선 토론에 참여한 네 후..
다음주 월요일이 20대 대선 후보자 등록 마감일이다. 그런데 십수년 전에 방영된 이라는 드라마의 음식 경연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잘 차려진 밥상 중에서 하나를 임금이 골라서 승자를 정하는 내용이었다. 선거도 이런 밥상 차리기와 차려진 밥상 중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택을 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음식 경연에서 임금이 차려진 밥상 모두에 만족을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승자는 없고, 경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좋든 싫든 누군가를 뽑아야 한다. 뽑지 않겠다고, 다시 상을 차려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차려진 밥상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좋은 밥상 차리기를 담보할 수..
안철수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오래 이어지고 있는 그의 정치적 부진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흐뭇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지치지 않는 정치적 도전을 보노라면 그렇다. 그가 정치사회에 들어와서 겪은 조롱과 모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잘 삼키며 견디고 있다. ‘삼키다(swallow)’는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그는 거듭되는 좌절을 속으로 삭이며, 끈질긴 노력으로, 여러 분야에서 이룬 성과를 정치 영역에서도 보려고 한다. 그 점은 훌륭하다. 그는 지금도 그렇다. 여론이 그네타기를 하고 있는데도 늠름하다. 한 자리 숫자로 시작한 지지율이 두 자리로 올랐다가 다시 급하향 추세여도 그는 개의치 않아 보인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돋보이지 않더라는 평가를 들..
지난주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보수의 무기는 유능이고 진보의 무기는 도덕성이라는데 양쪽 모두 무기가 없다. 어렵사리 열린 토론에서 보고 싶었던 철학과 비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지식 대결, 말꼬리 잡기, 무례한 태도가 시시때때로 등장해 불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바른 정치인이 되려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주요 후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서생의 현실감각에 상인의 문제의식을 지닌 듯했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 없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도 없었다. 얄팍한 지식으로 거침없이 만기친람 하려는 모양새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그뿐인가? 후보 본인과 가족에 대한 갖가지 의혹은 믿기 힘들 지경이다. 프랑스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
설연휴가 한창이던 지난 일요일. 윤석열 후보는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외국인 직장가입자 중 다수 피부양자 등록 상위 10인은 무려 7~10명을 등록했다”라고 지적하며 외국인 건강보험 급여 지급 상위 10명 중 8명은 중국이며, 이 중 6명이 피부양자라고 했다. 또한 “어떤 중국인은 피부양자 자격으로 약 33억원의 건보급여를 받았지만, 약 10%만 본인이 부담”했다며 “우리 국민이 느끼는 불공정과 허탈감을 해소할 방안을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했다. 국민이 애써 만든 건강보험 체계가 중국인들의 ‘숟가락 얹기’ 때문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바로잡겠다는 거다. 윤 후보는 대놓고 중국인 등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비난했지만, 실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