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한 달 앞이지만 유력 후보들은 연금개혁을 말하지 않는다. 이구동성으로 청년세대를 대변한다면서도 후세대 부담을 줄여줄 연금개혁에는 소극적이다. 표 계산이 앞선 탓일 거다. 국민연금 가입자인 유권자들에게 부담이 가는 이야기는 피하겠다는 셈법이다. 실제 가입자단체들의 공약 제안을 보면 대선 후보들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양대 노총,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참여하는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45~50%로 인상하는 대선 정책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보험료율 인상은 추가 소득대체율을 충당하는 수준이어서 현재의 재정불안정을 개선하지는 않는다. 또한 94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불평등끝장 2022 대선유권자네트워크’는 각 후보에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
지난번 어머니 기제삿날의 가족 모임에서도 주식이 화제였다. 전에는 목소리를 높여 경제에 대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단연 매제였다. 그럴 만한 것이 그는 한때 재벌 계열 증권사에 근무했고 데이트레이더로 ‘험하게’ 산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사뭇 달랐다. 공기업에서 박봉 하급 기술직으로 (지금도!) 일하는 매형이 ‘조선해양주’를 소재로 토론(?)을 주도했다. 제빵사 경력이 있으며 손재주가 좋아 화초 키우기와 요리에도 남다른 능력자인 매형은 전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해양주는 이미 많이 올랐는가? 빅3 조선사의 2022년도 선박 수주 전망은 어떠한가?’ 등을 거의 전문가(내가 듣기엔) 수준으로 풀어냈다. 뇌경색 발병 후 재활 중인 누나도 눈을 반짝이며 신년 주식시장 전망 토론에..
한국은 경제의 크기와 군사력에서 세계 10위의 선진국이다.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처절한 비극을 이겨내고 이룩한 성취이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생각할 때이다. 한국은 기후 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개방된 국제경제질서를 이루는 데에 적극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현재 164개 나라가 만들고 세계 무역의 98%를 품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안정되고 개방되며 공정한 틀로 자리잡는 것이 핵심사항이다. 한국은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과 달리 독자적인 거대 시장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FTA는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은 한·미 FTA에도 불구하고 삼성 반도체 영업비밀 제공을 요구했다..
신문사 칼럼 연재를 덜컥 수락했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다. 나는 글이나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출하고자 했다. 번지르르한 글과 말이 필자·화자의 삶과 괴리된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 경험상 인간은 대체로 그렇고 나는 그런 인간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글과 말은 아껴야 한다. 글말과 삶이 상반된 것도 싫고, 글말만 뱉어 놓고 행동하지 않는 것도 싫다. 글말이 앞섰다가 실천하지 못한다면 나도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미 실행한 일에 관해 쓰고 말하거나, 내가 꼭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를 다그치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글말을 앞서 남긴다. 이런 규칙을 세워 놓아도 가끔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뱉기도 한다. 예컨대 기자회견에 초청받아 연대 발언을 할 때 ..
국내 과학고를 다니다 미국 도심의 최하급 고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친구들에게 물리학 시험 정답을 돌렸다가 학급의 절반이 100점을 맞았다. 당시 교사는 나와 친구들을 모두 빵점 처리했지만 형사고발도 징계도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민 초기의 빗나간 상부상조로 탄생한 도덕적 낙오자들에게 기회를 준 셈이고, 나는 후회 없는 학창생활을 했다. 영화 에는 졸업장을 위조해서 취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시선은 차갑지 않다. 답답한 양극화 사회에 대한 호쾌한 해킹으로 보인다. 영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상과 인기를 누릴 때도 아무런 비난은 없다. 조국 가족의 표창장, 봉사·인턴 활동기록 위조 혐의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비도 없는 강제수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권력을 쥐게 될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야당 정치인들..
민주공화국은 법치국가를 지향한다. 지난 연말 소위 ‘공수처 1호 사건’으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법치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조 교육감은 해직교사를 부정 채용하기 위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와 임용 관련 국가공무원법위반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두 죄목의 핵심 구성요건은 “직권을 남용”하는 것과 “시험 또는 임용에 관하여 고의로 방해하거나 부당한 영향을 주는 행위”이다. 언뜻 보기에 엄단할 필요가 있는 반사회적 행위다. 그러나 ‘남용’이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자칫 오용하면 정상적인 권한행사마저도 처벌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법집행기관의 자의가 개입하기 쉬운 모호한 기준이다. 시험 등에 대하여..
코로나19 팬데믹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학교는 2020학년도 1학기부터 무려 4개 학기를 코로나19와 함께 보냈다. 연말연시 급증한 코로나19 앞에서 방학으로 한숨 돌렸지만, 이제 신학년도 수업을 준비할 때다. 그동안 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지난 2년 대학교육을 돌아본다. 장면1. 통상 30~50명 정도가 참여하던 대학의 학내 교수법 특강에 100명 넘는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는 초유의 현상이 나타났다. 교육보다는 상대적으로 연구나 산학협력 과제에 무게가 실려 있는 대학 교수들에게 ‘교수법’의 중요성이 제대로 실감된 것이다. 팬데믹 이전과 다르게 실시간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특강 방식에 접근성이 높아진 장점이 있지만, 수업 운영이라는 당면 과제, 즉 비대면 교육을 어떻게든 운영해야 하는 문제 ..
미국의 석학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이 필자의 흥미를 끌었다.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대한 경계로 일관하면서 현재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5가지 패러독스와 그 대안을 제기하고 있는 그의 주장을 우리 대선의 맥락에서 시사점을 찾아봤다. 미국 민주주의는 탈양극화와 타협의 정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탈양극화와 타협의 정치는 중간층을 차지하는 중원 장악의 룰이 작동해야 하는데, 당파적이고 편향된 선거 프로세스가 유권자들의 투표를 방해하게 되면 소수자 대표의 과잉과 편향이 고착화된다. 중도정치를 특징으로 하는 체제에서 정작 그 선거의 룰은 중도정치를 방해하는 방향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패러독스다. 돌이켜보면 한국 역시 지난 총선에서의 부정선거론이 정권 정당성을 부인하는 확증편향을 낳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