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났는데 마음속에선 계속 싸우고 있는 말이 있다.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지킨다는 말. 강자의 힘으로 약자를 보호한다는 논리다. 너희는 힘이 없지 않느냐, 우리가 힘이 돼줄게, 그러니 우릴 지지해라. 어떻게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힘을 강화해서 해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강자의 논리를 대표하는 이 말이 저항자의 언어 속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힘이 없지 않느냐, 우리를 지켜줄 강자의 우산 아래서, 그 힘으로 더 악한 강자를 막아내자. 노동운동 출신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갈 때도, 기득권 체제에 저항하던 청년들이 기득권 정당으로 들어갈 때도, 강자의 힘을 약자의 ‘빽’으로 만드는 마피아적 언사는 항상 튀어나왔다. 이번 선거에서는 그에 맞서는 약자의 저항 언어를 수없이 창..
4400만 유권자 가운데 3400만명이 넘게 참여한 대선이 불과 24만여표 차이로 결정되었다. 한국 사회가 둘로 쪼개졌다는 탄식이 들려온다. 세대, 지역, 젠더 등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하다는 우려도 많다. 당선인이 국민통합을 당선소감의 첫머리에 올린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리라. 당선인에게 쏟아지는 고언들도 하나같이 국민통합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국민통합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감대가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각자의 관점에서 국민통합을 이야기하다 보니 구체적 방안에 이르러서는 백가쟁명이 따로 없다. 상반되는 주문도 국민통합의 이름으로 제안되곤 한다. 그런데 국민통합은 이미 대한국민이 헌법으로 맺은 약속이자 국가권력의 과제다. 다만 헌법이 잘 지켜지지 않을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및 행복추..
한국은 학업성취 수준이 높은 국가 중에서 드물게 사교육 참여가 높은 국가로 기록된다. 사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고 순기능도 있으나, 과도한 사교육 참여와 비용 지출은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된다. 사교육비 부담은 출생률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빚을 내고 공부시키느라 경제적 빈곤을 겪는 ‘에듀푸어(edu-poor)’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지 오래다. 지난주 2021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예상과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사교육 참여와 사교육비의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2021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약 23조4000억원, 사교육 참여율은 75.5%, 주당 참여시간은 6.7시간으로 전년 대비 각각 21.0%, 8.4%포인트, 1.5시간 증가하였다. 전체 학생의 1인..
우리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후 이번 20대까지 선거를 통해 네 번 정치세력 교체, 여섯 번 지도자 교체를 해냈다.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가 결과에 불복하고 의회 난입사건을 일으킨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선거문화와 민주주의 공고화는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반칙과 변칙의 민낯을 그대로 보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반칙과 변칙이 허용됐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부와 명성, 권력을 쌓았다. 정치인들의 그런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치러진 이번 대선은 축제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우리 모두 이번 대선이 드러낸 세 가지의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고 앞으로 정치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
박빙의 승부에서 패자만 보이고 승자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의 득표율이 48.6%에 달하지만, 기권율을 합산하면 37.4%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턱밑까지 추격한 것을 볼 때 선거일이 하루 이틀 후였거나 결선 투표가 있었다면, 국민의힘이 이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20~30대 여성 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해 갈라치기가 되치기당했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선 후 일성으로 강조한 ‘통합’은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물론 병은 치유되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도 예상외로 선전했다는 이유로 패하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는가. 촛불 혁명을 계승한 정부라고 자부한 문재인 정부는 2년을 허송세월하면서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지난 총선에서 180석이라는 ..
과거의 성공 경험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높은 감염률과 낮은 치사율로 바이러스의 특성이 바뀌었지만,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성공적이었던 K방역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사고방식과 의료시스템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고, 정부정책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의료 인력 공백을 우려한 정부는 코로나19 확진 후 3일이 지난 무증상 의사의 진료는 허용하면서도, 진료받는 환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위양성이나 위음성의 위험 평가도 바이러스 특성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데, PCR 검사 결과가 아니면 못 믿는다는 경직된 사고로 코로나19 검사 역량에 과부하를 자초하고 있다. 결국 과부하를 감당 못하면 대안을 제시할 것인데, 이는 정책 불신만 더 초래하게 된다. ..
“국민통합 하겠다. 진보 정책, 보수 정책 가리지 않고 쓰겠다.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다양한 정치세력과 늘 소통하고 협치하겠다.” 이번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들이 쏟아낸 ‘국민통합’ 관련 말이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선거운동 과정은 비난 공방으로 얼룩졌으나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부터 선거운동을 마감하는 심야 연설장까지 후보들은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새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잘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후보들은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선거 프레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알 수 없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가 쓰는 모든 말은 선거용이겠으나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특히 그랬다. 초기..
2018년 10월, 노르웨이 북쪽 해역이 각종 무기와 병력으로 뒤덮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합동군사훈련이었다. 5만여 병력,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정 65척, 전투기 250대, 장갑차 등 전투차량 1만대가 투입됐다. 냉전 종식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29개 나토 회원국에 중립국인 스웨덴·핀란드도 참여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북극해에 미군의 항공모함이 등장한 것은 30년 만이었다. ‘나토 회원국인 노르웨이 해안에 적군이 상륙했다’는 가정하에 이뤄진 훈련으로 가상의 적국은 러시아였다. 서방 30여개국이 연합해 러시아를 자극하는 대대적 군사훈련을 펼친 까닭은 무엇일까? 중립국으로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펼쳐온 스웨덴과 핀란드까지 나토 군사훈련에 참여한 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