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익명표현은 인터넷이 가지는 정보전달의 신속성 및 상호성과 결합하여 현실 공간에서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의한 위계구조를 극복하여 계층·지위·나이·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국민 의사를 평등하게 반영하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되게 한다. 따라서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2010년 제기한 인터넷실명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문 내용이다. 곱씹어 보면 세계헌법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다. 과거 ‘편집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민주화운동서적들이 유통되었는가. 익명표현은 이렇게 민주주의에 중요하다. 하지만 익명통신의 자유는 ..
피장파장 논법은 익히 알려진 논리적 오류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주장이나 이론의 논리구조에 대한 논증이기보다는 이와 무관한 ‘사람에의 호소(ad hominem)’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주장의 참, 거짓을 밝히기보다는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인간성, 행적, 정황 등을 지적해서 그의 주장을 거짓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오류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종종 피장파장의 오류를 지적하는 논법이 보수 언론의 칼럼을 장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보수 정부의 정책 실패를 정책 난국의 원인으로 내세울 때, 피장파장식 오류 논법은 촛불 정부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식이었다. 민심은 적폐의 핑계를 대지 말고 촛불 정부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기에 사실 피장파장의 오류를 지적한 주장은 무..
취임한 지 세 달도 못 되어 새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 진영을 넘어 그 원인을 둘러싼 열띤 논란에 국민들의 시름이 깊다. 그 와중에 새 정부의 위기를 대통령 개인의 책임을 넘어 대통령제 정부형태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도 새삼 꿈틀거린다. 하지만 무능한 대통령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국정의 중심을 잡아줄 다양한 헌정시스템이 작용하는 한국형 민주공화제가 진화해온 역사가 우리 민주화의 과정임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근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선거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이제 생활현장에서까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 다양한 기본권으로 무장하고 투표로, 구호로, SNS로, 소송으로 민주공화제를 지켜온 것은 주권자 국민이었다. 대한국민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달성한 자..
2027년 5월,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저성장, 사회 양극화, 부의 세습,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비정규직 차별, 청년실업, 조기퇴직, 자영업 몰락, 노인 빈곤, 저출생 등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거나 최소한 해결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될까?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될까? 지금까지 봐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지난 22일 장차관 국정과제 워크숍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힘이 들어도 나라의 새 도약을 위한 기틀을 바로 세워야 한다”면서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꼭 필요한 개혁 과제임에도 기득권 저항이 예상되는 것들도 많다”고 진단했다. 그러..
행정안전부 경찰국 설립이라는 정책 이슈가 난데없이 쿠데타 논쟁으로 비화했다. 행안부 장관이 불을 질렀다. 그는 행안부 경찰국 신설을 반대하는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12·12쿠데타’라고 비난했다. 그의 발언이 뉴스를 타자 사람들이 경악했다. 전국 경찰서장 회의가 아무리 마뜩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끔찍한 군사반란에 비유할 수 있나. 그도 그럴 것이 ‘12·12쿠데타’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자신들의 상관 육군참모총장을 무장 병력으로 불법 납치한 하극상이 아니었던가. 이 일로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12·12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5·18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정권을 손에 넣었다. 신군부는 12·12, 5·18 두 차례의 군사적 행동에 이어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
여당 일각에서 갑작스레 주장하듯 아예 살인 자체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1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다. 흉악범에게도 인권을 보장해야 할까. 보통의 정의 관념과 달리 인권과 헌법의 원칙에 따르면 흉악범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흉악범이라도 형사소추를 앞둔 범죄자라면 무죄추정의 원칙, 피의자 방어권 등 적법절차 원리가 어김없이 지켜져야 한다. 그렇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피의자 인권보장이란 개념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무조건 용서하고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한창 논란 중인 ‘북한 어민’ 사건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을까. 윤석열 정부의 주장처럼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를 갖고 있으니, 북한으로 돌려보내..
메타버스 내 아바타의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법안들이 제안되고 있다. 메타버스는 상상의 공간이다. 현실 속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을 가상으로 경험한다. 건물이나 농사를 짓고 아이, 나라, 경제를 키우고, 전쟁이나 문명을 일으키고, 이것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킨다. 동물이 되어보기도 하고 신이 되기도 한다. 메타버스 이전의 시대에는 기존에 텍스트나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공간에서 제한적으로만 상상하던 것에 생생한 영상을 더하여 실감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상상세계 속의 일을 그 내용에 따라 처벌한다는 것은 상상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 이전에 우리는 영화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영화는 스토리 전개에 개입할 수 없고 등장인물의 관점을 취할 수 없지만 메타..
동료연구자가 늦은 밤에 전화했다. 슬프고도 우울한 목소리였다. 그는 ‘다음 학기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여러 대학의 공개채용에 지원해 볼 생각이지만, 자신은 없다고도 했다. 그는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0여년이 넘게 글을 쓰고 강의했다. 대학 강의실에 있을 때, 활기가 넘치던 동료였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심각한 존재의 위기를 맞이한 이의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나의 위로는 그를 더 비통하게 하는 듯했다. 며칠 후에는 동료 여성 연구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직장이 있는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그간 맡아왔던 대학 강의에서 해촉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에게 대학 강의는 삶의 소중한 영역이었다.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되어 그의 마음에도 어둠이 깔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