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생각해둔 글감들이 있었다. 글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필자들의 글을 읽었는데, 내가 꺼내려고 했던 이야기의 대부분이 들어있었다. 글감이 자꾸 사라져 당황했지만, 그건 그만큼 우리가 겪는 일상의 차별들이 어디서나 만연하고 보편적인 형태로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이 법이 소수를 위한 법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필요한 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차별금지법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위험한 징후는 그런 짓을 대놓고 해도 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속내를 감추는 것은 위선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헤아리고 배려하기 위한 공존의 규칙이자 사회화의 기능이기도 하다. 형식화된 에티켓은 계급의 옷이지만..
드디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대통령이 직접 가다듬었다는 취임사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는 시대적 사명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인 국민은 모두 ‘자유 시민’이 되어야 하고, 자유 시민과 함께 반지성주의로 오염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책임의식을 표출하였다. 제시된 시대적 사명은 국민주권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에서 당연한 원칙의 확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맥락을 곱씹어보면 강조점이 주어지는 가닥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자유’ 시민으로 규정한 국민을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국민의 ‘민주’ 시민성이 강조되어 왔던 문화를 고려하면 냉전시대의 구호를 연상시키는 ‘자유’ 시민으로 국민을 호명하는 취지를 다시 한번 되씹어보게 한..
학습연구년을 마치고 올해 학교에 복귀한 두 선생님을 만났다. 필자도 연구년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섰다. 일 년의 공백 후 마주한 세 학교의 상황은 엔데믹을 준비하는 교육 현실의 지표일 수 있다. 다소 열악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지역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기초학력미달이다. 협동학습을 시도하지만 아직은 잘 안 된다. 수업을 방해하는 정서적 문제를 가진 학생도 있어 학습장애와 함께 정서장애도 대처해야 한다. 학력을 쌓기도, 사회적 관계를 맺기도 취약했던 시기를 보낸 아이들이다. 거리 두기로 단축되었던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이 이제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올해가 정말 중요하다. 부유한 지역에 위치한 초등학교 6학년 교실. 기초학력미달 학생은 없다. 대부분 학력과 인성의 문제가 없고,..
우리나라의 생존과 발전, 평화의 전략은 미국의 세계전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자 동맹국인 관계로 그 영향이 때로는 직접적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온 미국의 세계전략이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신냉전 시대로의 회귀’로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세계전략의 특징과 내용,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세계전략과 충돌하고 있는 중국의 대응전략은 무엇인가? 그리고 미·중 간 전략경쟁이 한반도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우선, 최근 미국의 세계전략의 특징과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은 세계 강대국 정치 판짜기에서 러시아를 봉쇄하고 고립시키고 있다. 조 ..
‘표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KS 마크나 세계 표준을 떠올릴 것이다. 최근에 회자된 세계 표준의 예는 2020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K방역 세계 표준화’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세계 표준을 더 이상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준을 선점하는 단계에까지 올라섰다. 이제 세계 표준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앞서 세워나가는 ‘기준’이 되었다는 의미다. KS 마크와 관련해 우리는 표준을 획일적인 규격으로 종종 오해한다. 기계나 제품의 경우 표준은 일정한 크기와 모양을 규정한 규격이 맞다. 그러나 품질이나 안전 및 환경과 관련된 표준은 규격이 아니라 최소한의 질적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한글맞춤법통일안 같은 인..
“글쎄요. 저는 구 경영진과는 단 한 번도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해본 적도, 인사조차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 회사 앞에서 수년을 출근 투쟁했지만 눈 한번 마주친 적 없는 분들이라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내놓고 ‘나는 네가 이래서 싫다. 너의 문제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해주시면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설명이라도 했을 텐데 37년을 그런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느 날 퇴근길 라디오를 듣는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1981년 ‘한국 1호 여성 용접공’으로 HJ중공업(구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던 그는 1986년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부당한 부서 이동을 당했고 이에 반발해 무단결근을 했다가 해고됐다. ..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힐 위험에 놓인 가난한 시민을 돕기 위해 만든 장발장은행. 간단한 심사만으로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해준다. 그러니 벌금 낼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쏟아져 들어온다. 최근 대출심사를 하면서 한 통의 약식명령서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여성이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렸지만 갚지 못했고, 이 때문에 ‘사기’죄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빌린 돈만큼의 벌금을 받았다. 개인 사이의 민사는 이렇게 형사사건으로 둔갑하고, 단순 채무불이행은 사기범죄가 된다. 전과자를 양산하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법원은 피고인이 “빚을 갚을 의지나 능력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돈을 빌렸다”며, 피고인의 저 깊은 속내까지 파악해 형사처벌을 한다. 깜짝 놀랄 대목은 따로 있었다. 피고인의 약식명령서는 이..
얼마 전 통계청이 2020년 한국의 노인빈곤율이 38.9%라고 발표했다. 노인의 절반이 빈곤한 나라에서 이제 40% 아래로 내려왔다. 여전히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지만 계속 하향하는 점은 전향적이다. 무엇보다 기초연금의 역할이 크다. 2008년 8만4000원으로 시작한 이래 대통령 선거마다 10만원씩 올라 올해는 30만7500원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윤석열, 이재명, 심상정 후보가 한목소리로 기초연금 40만원을 약속했다. 윤석열 정부가 공약을 시행하면 노인의 가처분소득은 늘어나고 노인빈곤율도 더 낮아질 것이다. 그런데 기초연금 인상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예전부터 ‘기초연금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느냐’ ‘기초연금보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리자’ 등 연금개혁 방향을 놓고 이견은 존재했으나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