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에 서울 손님이 왔다. 3년째 지구촌 돌림병(코로나19)으로 마음 놓고 오가지도 못하다가, 3박4일 겨우 짬을 내고 용기를 내어 왔다. 더구나 서울과 합천은 큰마음 먹어야만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사나흘 전부터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 손님이 누구냐고? 여섯 살 손자 ‘서로’다. 이름은 ‘로’인데 성을 붙여 그냥 ‘서로’라 부른다. 서로 혼자 온 것은 아니다. 서로 엄마도 같이 왔다. 서로 아빠는 일터에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둘이만 왔다. 서로 엄마는 눈이 불편한, 정확하게 말하자면 1급시각장애인이다. 서로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서울 마포구 성미산 아래에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대구역으로, 대구역에서 다시 합천 황매산 자락까지 무사히 왔다. ..
최근 교육부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책을 발표했다가 교육계와 학부모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신임 장관이 경질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대통령에게 보고, 추진하려던 초등 입학연령 5세 학제개편안은 사실상 철회됐다.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교육부 수장이 현장 교육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 정책은 학생, 학부모, 현장 교사들이 공감하는 정책을 수립해야 그들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는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 교육 정책은 현장 파악, 여론 수렴 및 공론화 과정, 그리고 인프라 구축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도 절차를 무시하고 정책을 밀어붙였으니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과거 ‘대입 제도 개편’의 실패가 보여준 교훈이다. 교육부의 ‘5세 입학 추진’은 선 발표 후..
윤석열 정부의 학제개편안은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내놓았던 학제개편안과 꼭 닮았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6-3-3제를 5-5-2제로 바꾸면서 입학연령을 6세에서 5세로, 고교 졸업연령을 18세에서 17세로 낮출 것을 공약했다. 아울러 과도기 4년간 1학년 구성을 12개월간 출생자가 아닌 15개월간 출생자로 하면 학제개편이 완료된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안과 똑같지 않은가? 윤석열 정부안은 안철수 후보안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론이 비등하면서 각종 비판론이 쏟아지고 있는데, ‘5세는 원래 초등학교에 안 맞는다’는 식의 주장은 삼가자. 제도는 구성하기 나름이어서 심지어 4세도 다수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검토해볼 만한 비판론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4년..
주식시장은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2025년부터 만 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의 부작용을 곧바로 간파했다. 정책 발표 후 처음으로 개장한 지난 1일 사교육 업체들의 주가는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정부는 공교육을 살리고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이라고 강조했지만 수용자들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보충설명을 하고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1호 교육정책은 결국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로 나흘 만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이 학제 개편을 논의할 시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초·중·고교와 대학을 어떻게 둘지, 각급 학교에 몇 살에 들어가 몇 년씩 다니게 할지 등을 정해놓은 학제는 공교육의 기본틀이다. 한번 정하면 오랜 시간 변화 없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
차술차작(借述借作). 남의 답안을 베끼는 것이다. 수종협책(隨從挾冊)은 시험장에 책을 몰래 가져가는 일이고, 입문유린(入門蹂躪)은 대리시험이다. 정권분답(呈卷粉遝)은 답안지 바꿔치기이고, 외장서입(外場書入)은 시험장 밖에서 답안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1818년 조선 순조 때 성균관 학자 이형하가 상소문을 올려 지적한 ‘과거팔폐’(科擧八弊·과거시험의 8가지 폐단) 중 5가지다. 나머지 셋은 수법이 한 수 위다.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혁제공행(赫蹄公行), 매수한 사람을 시험장 경비원으로 바꿔 놓는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답안을 아무렇게나 써내고도 조작으로 합격하는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등이다. 옛날부터 단순한 커닝을 넘어선 시험 부정행위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고려 때 시작된 과거시험의 부정..
교육부는 통계청이 새로운 인구추계를 발표하면 그 자료를 이용하여 학생 수를 예측하고 새로운 교원수급계획을 발표해 왔다. 2016년 통계청의 인구추계는 실제 출생아 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해 2018년 4월 발표한 교원수급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교육부는 2019년 통계청 특별추계를 바탕으로 2020년 7월 ‘미래교육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교원수급정책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교원수급계획은 통상 10년의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2020년 교원수급 계획은 2021년까지 한시적인 계획으로 2024년까지의 예측자료만 발표했다. 교육부는 2022년 상반기까지 교원수급체계인 ‘K교육 선도형’도 새롭게 만들어서 발표하겠다고 했다. 교육부가 2019년부터 2020년까지 교원수급정책의 목표로 삼아왔던 ‘교사 1인당 학생..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 교육감 6명이 당선되었을 때 필자는 ‘교육가치 경쟁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2010년 민선 교육감이 뽑히기 이전 우리 사회는 교육에 있어서 경쟁과 협동이라는 두 가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합의가 불가능해 보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쟁과 협동의 가치를 오가며 혼란스러웠다. ‘교육가치 경쟁시대’란 보수진영의 성적 중심 경쟁가치와 진보진영의 역량 중심 협동가치가 한 시대 안에서 시·도 교육청에 따라 경쟁을 하고 국민이 선거를 통해 결과를 평가하여 우리 교육의 중심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 국민들은 다양한 교육가치들의 경쟁을 경험하고 무엇이 진짜 좋은 교육인지 합의점을 찾아가리라 믿었다. 무상급식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보수진영은 ..
미국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스펙 쌓기’를 둘러싼 비리와 부정의혹으로 한국 사회가 무척 시끄럽다. 아예 전문 상담업체가 있고 엄청난 액수의 수수료를 요구한다는 뉴스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원래 제품에 관한 설명서 정도로 이의 내용을 이해했던 ‘스페시피케이션’의 약자인 스펙이 입시나 취직을 준비하는 과정에 그렇게 널리 사용되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물론 미국에 종종 들를 때면 자녀의 명문대 입학 준비를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일부 한인 사회 안에서 나도는 이 단어를 나도 가끔 들었지만, 반세기 넘게 살았던 독일 사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용어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로 이른바 ‘기러기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뜸해졌지만, 아직도 나에게 자식의 조기유학에 대해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