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암이시라고?” 교무실에 조퇴증을 끊으러 온 민주의 말에 담임인 영희는 깜짝 놀랐다. 근래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병명이었다. “정말 암이라니? 어쩌다가……. 어머니 검진칩도 안 심으셨니? 목 뒤에 말이야. 아무 내과나 가면 심어주는데.” 영희는 목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단백질로 만든 나노미터 단위의 칩이라 만져지지는 않았지만. 민주 집이 그렇게 가난했던가, 영희는 잠깐 고민했다. 검진칩 시술은 싼 편이지만 그 돈도 없는 집은 없으니까. 칩 시술은 무상제공이어야 한다는 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지만 요새 국회가 싸우느라 바빠 아직 계류 중이다. “엄마가 그거 심으면 보험 비용이 오른다고…….” 영희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무슨 보험 무섭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어.” “해킹으로 개인정보 빼내..
미효는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자유롭게 살려면 많이 덜어내고 많이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미효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과 머릿속에서 형성되는 생각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파란 머리띠를 항상 머리에 쓰고 있다. 머리띠와 미효의 애증관계는 어느 날 의사가 알려준 사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의사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미효는 머리띠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조정했다. 소음과 흐릿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1년 전 만났던 의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검사 결과 환자분께서는 인지장애증입니다. 인지장애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중 초기 알츠하이머로 보입니다.” 미효는 머리띠를 조작해 ..
2034년을 주목하자.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작 18년 남았다. 두려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성찰해야 할 때다.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2034년 이후에는 국가채무를 갚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한 말이다. 대안은 증세란다. 그런데 지난 정부와 현 정부 모두 증세에 반대하기에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다른 기관도 아닌 국가기관이 이렇게 진단하는 건 예사롭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그건 모라토리엄의 징후가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우리에게 그 시간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언론에서도 의도적이건 아니건 크게 보도하지 않는다. 바보 나라다, 이건. 스물네 살 청춘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한다.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단순한 충격이 아니다. 미래 노동시장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갈지 보여주..
박해천 | 홍익대 BK연구교수·디자인 연구자 150만가구를 넘어섰다는 하우스푸어 구제책을 놓고 찬반 양론이 뜨겁다. 반대 입장은 사회 전반에 걸쳐 빈곤층 문제가 심각한데 왜 ‘하우스푸어’만 특별 대접을 받느냐고 반문하며, 투기적 성격이 강한 개인의 투자 실패에 정부가 나서는 것 자체가 시장의 규칙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지적한다. 반면 찬성 입장은 하우스푸어에 대한 대출 상환 압박이 임계치를 넘어서면 다량의 매도 물량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가격 폭락을 부채질할 것이고, 이런 양상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내수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근심한다. 양자 모두 아파트 시장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공유하지만, 전자의 입장은 이런 상황의 전개를 가격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이행의 관문으로 바라보는 반면,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