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우는 갓 여섯 살이 된 딸 서영이 가볍게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찬우의 아내인 연희는 남편의 마음이 불안해지면 곧장 알아채는지라 딸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물었다. “또 그 생각이야?” 찬우는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웃어보였다. 연희는 짜증을 내거나 잔소리를 하는 대신 찬우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세 식구를 서울에서 부산까지 태우고 가기 위해 옅은 잿빛 차량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찬우 부부가 함께 기록하고 있는 일정표 출발 시각과 단 1초도 다르지 않은 때부터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연희는 뒷좌석을 아동용 안전좌석 모드로 바꿨다. 딸 서영의 성장에 따른 사이즈 변화는 홈 데이터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되어 있는 가족용 ..
침대에 까는 얇은 요를 바닥에 펼쳤다. 요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진만은 그 요 한가운데 차곡차곡 개킨 티셔츠와 바지 몇 벌, 양말 몇 켤레, 수건 네 장과 담요 한 장, 대학 1학년 때 엠티 가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러곤 다시 요의 네 귀퉁이를 가운데로 모아 신발 끈처럼 단단하게 묶었다. 커다란 북극곰 엉덩이만 한 보따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이삿짐은 얼추 다 싼 셈이었다. 진만은 그 보따리를 다시 어깨에 동여매고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만을 보면서 정용이 툭 한 마디 던졌다. 누가 널 보면…, 전쟁 난 줄 알겠다…. 대학 졸업식은 2월23일이었지만, 정용과 진만은 이틀 전 서둘러 기숙사 짐을 빼기로 했다. 어차피 졸업식엔 참석하지 않기로 ..
영란 선배와 나는 기도했다. 우리 업계 사람들만큼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도 없다. 고래만큼 거대한 배터리 위에 기어 올라가 작업을 하고 내려올 때마다 우리는 3번씩 간곡히 기도한다. 영란 선배는 이번에도 “오늘도 우리 배터리가 폭발하지 않게 해 주시고” 대목은 소리 내어 읊었다. 5년 전 나도 배터리 연구를 하겠다고 영란 선배에게 처음 이야기했을 때, 영란 선배는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에너지 저장 장치가 다 배터리잖아요. 친환경 에너지라면서 풍차랑 태양 에너지를 쓰는 것은 점점 늘어날 텐데. 바람 많이 불 때 햇빛 강할 때, 많이 쌓인 전기를 모아 뒀다가, 바람 안 불 때 햇빛 없을 때 쓰려면, 커다란 배터리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일거리도 늘어..
S씨는 무거운 방사선 차폐복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산소통에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있고 차폐복 내 에어컨도 정상 작동되고 있으니 땀을 흘릴 이유는 없지만-아니, 물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이유가 없다 해도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왜? 왜긴 왜야, 망할 관료주의의 어처구니없는 노파심 때문이지. 로봇들에 맡겼으면 그냥 믿고 다 맡길 것이지 뭐하러 일 년에 한 번씩은 직접 들어가서 봐야 된다고…. 노파심이 아니라 편집증이야, 편집증. S씨의 상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사선 차폐 자동차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술자들이 하나둘 물러선다. 제어판 램프들이 모두 초록색으로 바뀐다. 아, 젠장, 이 낯선 아날로그 계기들, 익숙하지 않은 내연기관의 진동, 수동식 기어. ..
“그럼 내일 김경희 교수님께 한 번 더 진료받으세요.” 왓슨 선생님의 말에 민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선생님 뵈었으면 됐죠.” “하지만 법이 그래요. 제 진단만 들으면 안 돼요. 그분과 말씀 나눠보시고 저와 둘 중에 선택하세요.” “선생님이 이 병원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 선생님인데도요?” “알아요. 뭐 그래도 전 로봇이니까요.” 왓슨 선생님의 말은 모니터에 글씨로도 찍혀 나왔다. 왓슨 선생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모니터였고 모니터 한 귀퉁이에는 선생님의 감정을 표시하는 노란색 얼굴의 이모티콘이 찍혀 있었다. “저처럼 일부러 선생님 찾는 사람들 많나요?” “열에 셋 정도는요? 열에 셋은 관심이 없고, 열에 셋은 제가 진료하면 싫어하죠. 한 명 정도는 불같이 화를 내고요. 그러면 저는 벌써 201..
- 2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최영환은 외관상 사람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유나를 보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임자들이 전부 허가했어. 이제 네가 원하면 채널을 열어줄 거야. 이거 하나 허락하는 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끈 건지 원.” 유나가 인공으로 제작된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리면서 물었다. “이미 잘 아시잖아요. 두려우니까요.” “바로 그것 때문에 답답한 거야. 넌 이미 오래전부터 온갖 우주 영상들을 다 보고 있잖아. 그것뿐 아니라 여러 지식을 두루 학습했기 때문에 널 ‘전지적 인공지능’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그런데 아직도 구태의연한 공포심을 못 버려서는 일일이 만장일치로 허가를 받아야….” 유나는 인공 신체를 우아하게 움직여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제가 가장 배우기 어려웠던 주제, 기억..
영란 선배는 6개월 동안 우리가 밤 새우기를 잠자듯 하며 마침내 완성한 보고서를 미련 없이 덮었다. “이제 이건 됐고. 보고 자료는 어떻게 만들지?” “보고서를 이렇게 고생해서 지금 막 다 썼는데, 무슨 보고 자료를 또 만들어야 돼요?” “이런 두꺼운 보고서를 누가 한 장이라도 들춰 보겠어. 청에 계신 분들 다들 바쁜 분들인데. 간단하게 정리해서 파워포인트 세 장짜리 슬라이드로 만들어 보여줘야지.” 영란 선배가 말하는 ‘청’이란 우리 회사에 연구 용역을 맡긴 어느 공공 기관이었다. 이미 야근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어 가고 있었기에 영란 선배는 나의 좌절한 표정은 무시하고 바로 파워포인트 자료의 첫 줄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그분들이 제일 좋아하실 만한 주제는 이거야. 절벽 옆을 차 타고 가고 있는데 갑자..
별들은 가시광선으로만 반짝이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적외선과 자외선, 마이크로파, X선과 감마선까지 볼 수 있다면 밤하늘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P씨는 최근 인공 안구 펌웨어를 업그레이드한 뒤로 밤 산책에 매료되었다. 지상 세계도 각종 전자기파로 넘쳐나긴 하지만, 인공적인 빛들은 대개 일정한 파장이 등록되어 있고,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해 필터링하면 남는 것은 별빛이 휘황하게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에서의 황홀한 산책이다. P씨가 밤 산책 때문에 인공 안구를 이식받은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인공 감각기를 이식받았고, 그 다음으로 P씨를 비롯해서 직업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엄격한 심사와 오랜 심의를 거쳐 이식 수술을 받았다. 의사, 과학자, 초정밀 공학자들이 많이 받았고, 고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