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반려였던 아내를 무덤에 묻고 돌아온 날 밤, 나는 혼자 아내를 만나러 갔다. 아내는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 놓인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결혼식 날 그대로의 젊은 모습으로. “결혼할 때 패턴 저장 서비스를 신청하기를 잘했어. 그렇지?”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야. 흑역사 저장 서비스라고 서로 놀렸는데 말이지.” 내 눈앞의 그녀는 이 가상현실 온라인, VR넷에 상주하는 아내의 3D 아바타다. 우리는 결혼식 날 둘의 모습을 3D 스캔해 VR넷 입주 신청을 했다. 우리 둘의 아바타는 접속할 때마다 대화와 행동유형을 전부 기록해 패턴화한 뒤 대화형 AI에 기록한다. 지난 50년간 수집한 아내의 표정, 버릇, 종종 하던 말들이 내 말에 반응해 자연어처리를 통해 흘러나온..
“어디까지나 권유 사항입니다만.” 현종은 친구 청화의 스마트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고 들키지 않도록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이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 역시 각자의 언어로,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가장 자주 듣는 말이기도 했다. “유청화씨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드시고, 친구로 등록된 최현종씨는 알리오 올리오를 드시면 어떨까요?” 청화가 손목에 착용한 스마트링의 개인비서는 저녁 메뉴를 골라주었다. 청화는 현종을 흘끗 쳐다보았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화는 스마트링을 쓰다듬어 주문을 마쳤다. 링은 식당에 마련되어 있는 수신장치로 주문 내용을 전송했다. 현종은 자신과 청화가 저녁 식사로 주문한 음식과 점포의 위치가 거대한 데이터 모음 속..
진만의 할아버지는 올해 일흔여덟인데, 이 분의 특기는 ‘사기를 당하는 것’이었고, 취미는 ‘사기꾼과 사귀는 것’이었다. 이건 진만이 한 말은 아니고, 진만의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내뱉는 혼잣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스무 살 이후 매번 그 사기의 뒷감당을 해야만 했다. 진만이 목격한 일도 몇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일어났는데,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휴거’ 소동에, 그 열혈 신도 중 한 명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깊숙이 빠져든 것이었다. 당시 진만의 아버지는 막 이혼하고 전국 아파트 공사현장을 떠돌고 있었는데, 그래서 진만은 안양 다세대 주택 이층에서 그의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속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상가 건물 꼭대기 층에 자리 잡..
영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저희 모바일 하우징 제품은 정말 완전 미래 신기술이거든요. 이거는 걸어다니는 집입니다. 움직여서 이동시킬 수 있는 집이거든요.” 나는 다시 소개 자료를 들이밀었다. 우리 회사의 제품은 공장에서 한 덩어리로 찍어내는 집이었다. 신소재로 만들어진 우리 회사 제품은 가벼워서 트럭에 통째로 올려놓고 그대로 운반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튼튼하고 안전해서 트럭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전기, 수도, 인터넷을 연결하는 것도 최대한 간편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빈 땅만 있으면, 예전처럼 집 짓는 데 드는 돈과는 비할 바 없는 싼값으로 건물을 세워놓을 수 있었다. “뭐, 그럴듯하기는 한데요. 요즘 인구가 줄어서 ..
“두 분 다 처음이신가요?”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S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한 번 더 확인 드릴게요. 기본적으로는 두 분의 DNA를 예전처럼 그대로 조합합니다. 그리고 전체 스캔을 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유전적 결함을 찾아 수정하고, 그다음에 두 분이 선택한 옵션들을 넣고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 확인 조정하고, 실제 수정란에서 마지막으로 오류를 바로잡은 다음 착상시키게 되죠. 오늘은 첫 단계로 옵션을 고르실 차례예요. 여기에 두 분이 원하시는 자녀상을 자유롭게 작성해주세요.” 줄 없는 노트를 내밀자 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뭔가 선택지 같은 건 없나요?” S는 웃었다. “옛날 우스개에서 나온 말이 사회적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린 거예요. 주사위 굴려서 체력이나 지력 포인트 올리..
- 5월 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3월이 오자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피난’ 준비를 했다. 나는 학교에 임시 홈스쿨링 신청을 했고 부모님도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우리 집은 앞으로 2개월간 서울을 떠나 있을 것이다. “괜찮아. 시골은 안전해.” 아빠는 차에 캐리어를 실으며 말씀하셨다. 서울 시내는 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야 할 만큼 뿌옇고 칙칙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독면과 고글을 쓰고 있다. 방독면을 쓴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아장아장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눈앞을 지나는 유모차는 유리덮개로 덮여 있고 아기는 얼굴 전면을 덮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5년 전, 미세먼지가 대량 발생하여 서울 시내에서만 스무 명이 호흡기질환으로 사망한 사건 이후, 정부는 공기오염을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
굉음과 암흑.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크고 까끌까끌한 먼지들. 공기가 목에 뭉쳐 더 이상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순간 현호는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 굵은 밧줄로 두 다리를 꽉 묶기라도 한 듯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현호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현호는 강한 약품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몸보다 조금 큰 유리캡슐 속에 누워 있었다. 왼쪽에는 비교적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성이, 오른쪽에는 하늘색 가운을 입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현호는 눈을 껌뻑거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펴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돌이켜보았다. 낯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그의 마음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자상한 얼굴로 현호를 내려..
네 아버지가 점점 개가 돼가는 거 같다. 지난달 중순 무렵, 정용의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왜요? 또 두 분이 다투셨어요? 정용이 묻자,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싸우긴 뭘…. 말 상대가 돼야 싸우기라도 하지…. 이건 그냥 개라니까, 개. 원체 입이 건 어머니이긴 하지만, 사실 정용 또한 아버지를 볼 적마다 속으로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선인장이나 화초, 기둥처럼 좋은 것들 대신 자꾸 개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58년 개띠라서 그런가? 하지만 정용의 아버지는 여타 다른 아버지들처럼 인간과 개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까지 술을 마시는 사람도 아니었다. 정용은 동네의 몇몇 그런 아버지들을 알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그냥 개’가 되어버리는 아버지들, 온 동네를 돌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