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하루아침에 인터넷 용량을 열 배로 늘려야 한다는 정부 지시가 내려왔던 날이었다. “예전에는 컴퓨터로만 인터넷을 했는데, 이제는 전화로도 인터넷을 하고 TV로도 하고, 시계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잖아요. 내년부터는 IoT(사물인터넷) 혁신법이 통과되어서 인터넷에 연결되는 기계가 훨씬 더 많아질 거예요. 지갑도 인터넷에 연결되고, 볼펜도 인터넷에 연결되고, 밥솥도, 냄비도, 신발도, 거울도, 빗도.” “아니, 빗을 인터넷에 연결해서 뭘 하는 건데요?” 질문에 답을 듣기는 어려웠지만 그게 IoT이고 그게 미래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인터넷 용량을 갑자기 그렇게 늘릴 수는 없다고 하니, 어떤 상무인가 전무인가가 무슨 교수의 말을 듣고 완전 자동화 인공지능 자율네트워킹 장비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로켓이 지나가는 우주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선창 밖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별 하나하나가 추억처럼, 사랑처럼, 동경처럼, 시(詩)처럼 반짝입니다. 추억이 시처럼 반짝이는 계절이 가을 말고 또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문득 쓸쓸함을 느끼고 어머니, 당신을 떠올립니다. 어머니. 저는 어린 시절부터 별들에게 하나하나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잠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별들은 낮에 놀았던 친구들처럼 밤하늘에서 반짝여 웃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커서 우주학교에 다니기 위해 밤늦도록 공부하다 문득 바라봤던 밤하늘의 별들도 친근하고 정답게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것만 같았고, 그건 아버지가 탄 배가 소행성대에서 실종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던, 우리가..
“자, 번지점프 준비.” 우리는 이 일을 ‘번지점프’라고 부른다. 3만6000㎞ 상공의 정지위성 궤도에 놓인 우리의 작은 위성에서 케이블을 매단 드론이 강하하는 순간, 우리는 20세기에 로켓이 대기권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순간을 지켜보던 NASA 직원들처럼 숨을 죽인다. 물론 그들은 올라갔고 우리는 내려간다는 차이는 있지만 긴장감은 다르지 않다. 케이블이 하강하면서 균형점이 변하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도 같은 속도로 추를 단 드론을 날린다. 철강의 100배 강도를 갖는다는 다층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케이블이라지만, 3만6000㎞ 길이의 인장력을 확인하는 순간만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예전에도 다른 업체에서 케이블을 설치하다 갑자기 일어난 돌풍으로 케이블이 중간에 뚝 끊어지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아..
“발파!” 형서와 찬우는 다소 긴장된 얼굴로 소행성 아포피스의 표면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소행성 채굴 우주선 ‘마이더스호’의 조종석이었다. 아포피스의 표면에서 먼지가 살짝 피어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발파’라는 거친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형서와 찬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여정의 반환점을 지금 막 성공적으로 돌았다. 먼지가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지자 아포피스에 찰싹 달라붙은 채굴 기계 ‘거미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미의 배에서 나온 파공기는 표면 밑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방금 두 사람은 파공기 끄트머리에서 자그마한 폭발을 일으킨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밀하게 계산해 자그마한 폭발을..
죽도록 무거우니까 죽이 아닐까. 트럭 위로 호박죽과 전복죽이 가득 담긴 들통을 나르면서 정용은 그런 생각을 했다. 된장국을 나르고, 접시 200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박스를 옮기고, 플라스틱 원형 테이블을 짐칸에 실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죽을 나르고 나니 온몸이 흐물흐물 공기 중으로 풀어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아침 8시가 지났을 뿐인데…. 아르바이트 종료 시간은 오후 6시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 정용과 진만은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를 뛰기로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나가게 된 아르바이트인데, 일당은 7만원이었다. 뷔페 알바? 그거 뭐 대충 접시 들고 왔다 갔다 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진만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정용 또한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뭐, 서빙 정도야…..
처음 차세대 스마트 하이웨이를 도입한다면서 공사에서 세부 계획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게 또 무슨 한심한 짓인가 싶었다. 자고로 ‘차세대’라는 말로 제목을 꾸민 사업치고 진부하지 않은 것이 드물었을뿐더러, 이제는 유행도 끝물이다 싶은 ‘스마트’라는 단어를 또 갖다붙인 것을 보면 세태를 읽는 감각도 한참 떨어진 사람들이 꾸민 일 아닌가 싶었다. “고속도로가 스마트해진다고 해봤자, 뭐, 밥솥에서 연예인 목소리 나오게 하는 장치 수준 아니겠어요? 톨게이트에 음성 인식 장치나 달아 보려고 하는 건가?” 나는 영란 선배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영란 선배가 이번에도 나와 신나게 맞장구를 치며 공사의 높은 분들 욕을 같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영란 선배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 S씨의 출근 강화 근육용 강화 아침을 먹고 S씨는 현관 옆 벽에서 자전거를 내려 출근길에 나섰다. 도로는 이미 각양각색의 자전거들이 일사불란하게 고속으로 달리고 있다. 모두 인공 근골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시내에서는 물론 도시와 도시 사이 이동과 운송도 자전거로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거추장스러운 자동차들은 좁은 자동차 전용 차로에서 띄엄띄엄 보일 뿐이다. 가볍고 단단한 인공 골격과 쉽게 지치지 않는 고출력 인공 근육은 삶을, 그리고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엔진 하나의 출력을 가진 삶, 한 집 한 집이 발전소 하나의 전력을 내는 세상으로. 회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 S씨는 다른 자전거 이용자들과 함께 속도를 줄이며 중앙 차로를 비운다. 잠시 ..
내가 태어난 다음날 아빠는 아직 채 눈도 못 뜬 내게 ‘주노’를 선물해주셨다. “요거 하나만 있으면 뽀로로는 우습대. 애 키우기 진짜 쉽대.” 아빠는 내 포대기 안에 주노를 넣어주시면서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주노는 나와 비슷한 몸집의 곰돌이 인형이었다. 외형상으로는 그랬다. 내 포대기 안에 들어온 주노는 갈색 털이 난 짧은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내가 처음 한 동작은 주노를 마주 끌어안는 일이었다. 나는 주노가 없으면 울었고 주노를 주면 울음을 그쳤다. 잠이 안 와 보채다가도 주노만 안으면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옛날에도 ‘인생 인형’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어릴 때 인형이든 뭐든 사물 하나를 옆에 두어 유착관계를 맺게 하면, 그 사물이 부모나 형제의 역할을 보조해준다고.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