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규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상담 직원인 원철에게 말했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왔습니다.” 원철은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 본 것처럼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반투명 전자패드를 펼치고 자료를 천천히 넘겨 보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결과를 바로 원하시는 거죠? 하지만 정해진 절차가 있어서 고객님 시간을 조금 더 빼앗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았다가 클레임이 걸리는 경우도 많고, 잘못하면 벌금까지 물 수 있으니까요. 제 동료는 며칠 전에 사전 설명을 조금 생략했다가 화가 난 고객께 맞았지 뭡니까. 아무래도 얼굴이 업무 자산의 절반이다보니 전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형규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커피로 손을 뻗었다..
부자들은 겨울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채 부치고 장작 때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 요즈음 가난한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곳 마음 줄 계절이 없다. 계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인색해지고 예민해지는 법. 그러니까 근래 들어 진만을 바라보는 정용의 마음이 꼭 그랬다. 얼굴만 봐도 괜스레 짜증이 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분. 숨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팽팽한 철삿줄이 팅팅 소리를 내며 퉁겨지는 듯한 느낌. 그냥 이대로 찢어져서 따로따로 살까? 정용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시작은 선풍기 때문이었다.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정용과 진만이 함께 자취하고 있는 반지하 자취방은 그야말로 습식사우나실로 변해 버렸다. 열기는..
미래의 고객님께. 안녕하십니까. 미디어 시행령 7조 8항에 의거, 이 멀티미디어 메일이 광고임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동조 11항에 의거, 본 내용의 첫 항목까지 읽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음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셀레스트 데이터’는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을 되살려드리는 업체입니다(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버튼을 눌러 바로 광고를 삭제하실 수 있습니다).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저희 셀레데이터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한때 유행했던 빅데이터라는 용어를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빅데이터를 내세웠던 업체들은 빅데이터가 인류의 난제를 여럿 해결하고 더 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복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어느 정도 과장은 있었지만 빅데이터는..
“찾았습니다.” 과제를 부여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강한 인공지능’의 첫 번째 실험기가 완성된 뒤, 맨 먼저 스스로 롤모델을 찾아보라는 명령을 입력했었다. 그러고는 중앙도서관의 전자책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연결해주었다. “누구를 선택했어? 어떤 작품이지?” 인공지능의 답은 의외였다. SF스토리만 최소 수천 편은 읽었을 텐데. 내심 아시모프의 을 고르지 않을까 했었다. 200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인간의 친구로 지내면서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공지능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엔 인간으로 공인받는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그러나 인공지능이 선택한 롤모델은 고전문학의 주인공이었다. “아시모프 작품을 고를 줄 알았는데? 의 앤드루 아니면 의 다닐 올리버 말이야.” 인공지능은 대답을 하기 전..
정유는 습관처럼 ‘실버라이닝 TV’의 화면을 켰다. 실버라이닝은 수백개에 달하는 전 세계 인터넷 방송사들 가운데 하나였고, 매월 집계되는 방송사 순위에서 단 한 번도 200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규모가 작았다. 실버라이닝의 첫 화면에는 방송사 내에서 시청자가 가장 많은 채널들이 순서대로 늘어서 있었다. 1위는 천천히 녹고 있는 빙산의 실시간 중계, 2위는 수천 마리 굼벵이들이 탈피를 위해 나무로 기어오르고 있는 어느 숲의 실시간 광경이었다. 상위 방송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성 넘치고 독특한 온갖 사람들의 매력을 광고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실버라이닝은 이른바 ‘느긋한 방송’을 주로 다루는 방송사 중 하나였다. 정유는 즐겨찾기에서 ‘나비아기’ 채널을 골라 화면을 띄웠다. 방 한복판에는 아기용 ..
벽은 얇고 소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왜 늘 그런 벽 뒤에서만 살았을까? 정용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바람보다 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방, 소리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 집, 벽을 만나면 더 커지는 소리들…. 진만과 함께 구한 광역시 반지하 자취방 역시 그랬다. 밤마다 웅웅웅 어디선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옆방 남자의 코 고는 소리와 위층 사람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심지어는 누군가의 이 가는 소리까지. 소리는 어두워질수록 더 커졌고, 더 깊어졌다. 정용은 그게 다 가난한 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가 텅텅 빈, 합판으로 세운 벽…. 그런 벽 뒤에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몸에서도 텅텅, 공기 울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벽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그들은 옆방에 사는 남자의..
영란 선배가 근사한 저녁 식사를 사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이번에 또 내가 진급 심사에서 떨어져서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미리부터 짐작했다. “정말 미안해. 내가 너를 이 바닥에 끌어들였는데. 이렇게 ‘헬센서’가 통째로 망하는 판이니까, 진짜 도리가 없네. 3년 전만 같았어봐. 너 정도면 벌써 한참 위 직급일 텐데.” 짐작대로였다. “괜찮아요. 안 잘리고 회사 오래 다닐 수 있으면 됐죠. 정리해고된 사람도 많은데요, 뭘.” “그래도, 예전에는 헬센서 직원이면 곧 갑부될 줄 알았던 사람도 많았잖냐.” 영란 선배는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듯이 헬센서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시절을 대강은 알고 있다. 집 안 곳곳에 온갖 센서와 카메라를 달아 놓고, 집 안에 뭐가 있는지, 집 안에 ..
어렸을 때, 부모님이 컴퓨터 좀 그만하고 책을 읽으라고 하시면 짜증냈던 게 기억난다. 내가 그렇게 될 줄이야. H씨가 가상현실 그만하고 컴퓨터 좀 하렴, 걱정스럽게 말하면 아이는 짜증내며 말한다. 이것도 컴퓨터랑 똑같은 거거든요? 정보량은 훨씬 더 많고요. 눈으로 텍스트랑 동영상을 보는 건 정보 효율이 너무 낮아요. 사람은 온몸으로 정보처리를 해야 하는 존재라고요. 그래, 그렇지만 쓰레기 정보들을 관성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지. 그러면 아이는 말이 말 같아야 대화를 하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이마에 전극을 달고 데이터스피어에 접속한다. 반에서 아직까지 멍청하게 전극을 쓰는 건 자기밖에 없다면서 신경-회로 접합 수술을 해달라고 조르지만 H씨는 졸업할 때까지는 절대 안된다고 못박아두고 있다. 물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