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플래카드가 사거리 횡단보도 반대편 가로수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지난 1월16일 밤 12시쯤 이곳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1톤 트럭 사고를 목격한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가로수 옆을 지나쳤던 진만은,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거 날 찾는 플래카드잖아.’ 진만은 다시 걸음을 돌려 플래카드 앞에 섰다. 맞네, 그날이 맞아. 진만은 자신이 건너온 횡단보도를 뒤돌아보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 남아 있는 잔설 위로 차량..
-2017년 12월 8일자 지면기사- 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
“글쎄, 이럴 거면 보험을 안 들겠다니까요!” “고객님, 자동차를 구입하시려면 보험 가입은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필수로 들라고 하면 나한테 선택권은 줘야 할 거 아뇨?” “… 과학적 통계에 따라 책정된 보험료이기 때문에 고객님께만 특혜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22년 무사고 운전자다. 늘그막에 차 한 대 새로 장만하려 했더니 화딱지가 나서 죽겠다. 요즘 다들 자율주행차를 타지만, 당최 컴퓨터한테 운전을 맡길 마음이 안 난다. 그래서 없는 돈 박박 긁어다가 수동 운전도 가능한 비싼 모델을 구입했다. 그런데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려니까 자율주행차량이 아니고 내가 직접 운전하면 보험료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보험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운전모드 선택 항목이 있었다. 보험설계사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
“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김 선생은 안 오십니까?” “아…모르셨어요?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석 달 만에 다시 열린 동네 애서인 모임에서 박 선생은 내 대답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얘기해 봐야 더 안타까울 뿐이다. 동네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을 모아 애서인 모임을 만든 건 김 선생이다. 그동안 모임 이름도 없이 몇 번 모였다가 ‘다음번엔 멋지게 하나 지읍시다!’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게 김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설 연휴 때였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가 뒤표지가 찢어진 을 집어 들고 살펴보는데 그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첫 번역판이네요. 보기 힘든 건데. 번역자가 엉뚱한 사람으로 나와 있거든요.” 그 몇 마디에 심..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이게 과연 될까? 차라리 책을 읽거나 상담소를 가는 게….’ 사실 멘토링하는 인공지능(AI) 얘기는 진작 들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다. 삶이 딱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직장에서 잘리고, 몇 달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시작한 카페를 1년도 못 가 접고, 간신히 조그만 물류업체의 총무 일을 맡기까지 인생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정적으로 아내가 별거를 선언했다. 아이를 데리고 떠나면서 남긴 말이 마음에 쓰리게 남았다. “당신은 일이 안 풀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야! 늘 남 탓만 하고 운이 나쁘다고만 하지. 원인이 당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이가 뭘 보고 배우겠어?” 술로 달래면서 괴로워하던 나날 중에 문득 TV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들어..
“어서 오십시오, 최준열 고객님. 재배열 클리닉에 잘 오셨습니다. 사전 주문서를 제출하지 않으셨군요. 상담을 원하십니까?” 준열은 다소 딱딱한 의자에 앉아 눈앞에 떠 있는 입체 영상을 바라보았다. 영상의 주인공은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물론 준열은 젊은이의 그림 뒤에서 정말로 상담을 제안하는 존재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상담을 해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상담사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모든 상담사는 재배열을 경험해 봤으므로 누구를 선택하든 유익한 상담이 될 겁니다. 우선 재배열 이전의 인간 속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상담사가 있습니다. 재배열 후 선택할 직업에 맞게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상담사가 있고요. 유전공학으로 노화 지연 시술을 받은 상담사가 있습니..
함께 자취하는 진만이 앓아누운 것은 지난주 목요일의 일이었다. 휴게소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이 다 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진만을 툭툭 건드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깨까지 벌벌 떨면서 애벌레 모양으로 이불을 제 몸에 감았다. “너무 추워. 보일러 좀 올리면 안 될까?” 11월이었지만, 아직도 낮에는 20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정용은 반팔 차림으로 멀거니 진만을 내려다보았다. 감기 걸렸나 보네. 알바 또 잘리겠군. 정용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일러 전원을 켰다. 그러곤 그 길로 나가 곧장 PC방으로 향했다. 알바 자리를 검색해볼 마음이었지만, 거의 아홉 시간 가까이 오버워치만 하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진만은 그때까지도 계속 이불을 친친 감고 있었다. 옆머리가 땀에 흠뻑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