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도 칩 이식받고 싶어.” “글쎄 위험하다니까! 잘못되어서 뇌출혈 일으킨 사람 뉴스 못 봤니?” “우리 반에서 안 한 사람 이제 나밖에 없어. 애들 다 칩 심어서 지들끼리 톡하고 게임하고 논단 말야!”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속상함과 죄책감, 미안한 감정 등등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속절없이 누를 수밖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쓰였다. 유전자 맞춤 아기가 대세가 되었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엄마나 아빠에게 특별히 취약한 유전자는 없었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그냥 낳았는데, 자라면서 계속 문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때부터 유전자 맞춤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납입 보험료가 높게 책정되었다. 꼼꼼한 건강진단서를 첨부해도 별 소용이 ..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인지신경과 의사인 최민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환자 서연수를 바라보았다. 서연수는 시술용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서연수는 어깨 근육이 팽팽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철에게 그 긴장은 오히려 좋은 신호였다. 환자의 의식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서연수는 심호흡을 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환자께서는 지금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미래병원 신경외과 수술실에 와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면 그렇다고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서연수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저는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와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받으면 부작용으로 성..
“정용이…? 너, 정용이 맞지?” 그녀가 얼굴을 좀 더 앞쪽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정용은 어떡하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고개를 숙여보았지만, 더는 피하긴 어려워 보였다. 손님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그녀 주위로 중년 여자 두 명이 다가와 참견했다. 그녀는 그녀들을 이모라고 불렀다. “응. 대학 동기를 여기서 만나네.” “그래? 그럼 특별히 큰 놈으로 주시겠네. 호호호.” 똑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큰소리로 웃었다. 정용은 그 앞에서 정말이지… 오징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정용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징어는 타닥, 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제 몸을 말기 시작했다. * 단군 이래 최장 연휴라더니 그만큼 아르바이트 자리도 많..
P씨는 흥겨운 보사노바 재즈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곡이 끝나자 피아니스트가 객석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나실 시간이군요. 그와 동시에 P씨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밴드를 벗어 들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밴드를 사용한 지 이제 사흘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상쾌한 기상 시간을 맞은 것도 사흘째이다. 밴드 한쪽에는 두께가 2㎜ 정도 되는 작고 납작한 패널이 붙어 있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알람용 머리밴드 역시 이 에너지팩을 전원으로 쓴다. P씨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어린애처럼 그 팩을 계속 쓰다듬으며 손에서 놓을 줄을 몰랐다. 이 작은 팩은 지금 전 세계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20세기부터 꾸준히 연구 개발되던 대..
회의는 다섯 번째 안건이 나올 때까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다섯 개의 안건은 전년도 결정안을 그대로 답습하고 어휘만 다듬은 것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부서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는 늘 뒷전으로 밀리고 마는 위원회, 즉 교육위원회의 오늘은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원장은 저전력 스크린페이퍼를 살짝 흔들어 다음 안건을 눈앞에 띄웠다.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위원장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다음은… 이게 무슨 뜻이죠? 발안자가 최정안 위원이군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최정안은 의자를 조금 뒤로 밀어 등받이에 체중을 맡기고 최대한 천천히 대답했다. “안건 명은 최대한 간단하게 작성했는데요. ‘인공지능 교사 도입을 위한 준비작업 - 개요부터 결론까지.’ 제목에 오해할 여지는 없는 걸로 보이..
학원 가방을 둘러멘 여자아이가 숨 가쁘게 달려오다 내 옆에서 걸음을 늦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술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영어, 중국어, 피아노, 발레 학원도 다닌다길래 힘들지 않으냐고 묻고 보니 머쓱했다. 어른들은 선행 학습을 하지 않으면, 남다른 것을 하나라도 더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은 그 두려움이 진실이라고 믿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교육은 복된 미래를 줄지 모르는 토테미즘이다. 제단 앞에 바치는 양에게는 어떤 기대도 없이 오로지 신의 전지전능함만을 바랐던 이들처럼 어른들은 불안할 적마다 보다 용한 선생과 밝은 앞날을 보장하겠다는 학원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미술 학원, 내일은 피아노 학원과 중국어 학원에 ..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진만이 전봇대를 가리키며 정용을 불렀다. “이것 좀 봐봐.” 정용은 힐끔 전봇대를 바라보았다. 싼 이자, 신축 빌라 분양 같은 광고지 사이에 누군가 방금 붙이고 간 것 같은 깨끗한 전단지 한 장이 나부끼고 있었다. - 집 나간 고양이를 찾습니다. 이름: 미나(2살) 노랑둥이. 눈은 호박색. 사고로 인해 꼬리가 짧음. 미림아파트 7단지에서 실종. 사례금 100만원 “이게 뭐?” 정용은 다시 돌아서려 했지만, 진만이 그의 팔을 잽싸게 잡았다. “사례금이 백만 원이나 된다고.” 전단지에는 사례금 아래 ‘가족 같은 고양이입니다. 꼭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그게 뭐? 주인도 못 찾는 걸 우리가…” 정용이..
래시가 가출했다. 며칠 전에 나비가 없어지더니 이제 반려견까지 사라진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 개와 고양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직접 키워서 가족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였는데. 물론 래시는 산책을 자주 시켜줬지만, 나비는 고양이치곤 겁이 많아서 집 바깥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던 아이다. 앤드루에게 CCTV를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답이 나왔다. 집 안팎 어디에도 래시가 나가는 장면은 찍혀 있지 않았다. 야간 촬영 모드도 꺼져 있었기에 밤중에 나갔다면 알 방법이 없다. 잠긴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도 수수께끼다. 넋두리 삼아 앤드루에게 말을 걸었다. - 얘가 어디 간 걸까? 나비도 그렇고 래시도… 바람이 났나? - 아닙니다. 뜻밖의 단호한 대답에 흠칫했다. - 바람난 게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