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 무렵, 진만은 남들은 다 먹는 삼계탕은 먹지 못하고, 그 대신 더위를 먹고 말았다. 몇 달 전에도 한 번 해봤던 물류창고 야간 상하차 알바를 닷새째 했을 때였다. 저녁 출근 준비를 위해 샤워를 하는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무겁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어, 뭐지? 진만은 샤워기를 든 채 가만히 변기 위에 앉았다. 현기증도, 무력감도, 나아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진만이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은 밤 9시부터 오전 9시까지였다. 지역에 따라 분류된 박스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는데, 예전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사흘 정도 하니까 몸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이런 더위에, 대낮에 일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밤에도 이렇게 더운데… 진만은 쉬는 시간마다 함께 일하는 ..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용은 한 여자를 보았다. 목이 다 드러나는 짧은 헤어스타일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흰 면티를 입은 여자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고개가 그쪽으로 갔다. 밤 10시가 지난 시각,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거나 교차로 앞에 정차할 때마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들큼한 과일 향이 났다. 사람들은 과육 안에 점점이 박힌 씨처럼 혼자 서 있거나 좌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여자는 정용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좌석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뭐지? 아는 얼굴인가? 정용은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알바하다가 본 얼굴인가? 정용은 편의점과 피시방과 한과 공장과 택배 물류창고..
1. 답신 오해하지는 말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쪽이 보내온 카톡을 보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냥 모른 척할 수만 없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 답문을 보내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사실 저는 오늘 소개팅을 나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제 처지에 지금 소개팅이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미향이가 지난주부터 계속 자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나가달라고 부탁 문자를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어요. 미향이 얘가 날 앞으로 얼마나 보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까 낮에 제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건 작년 여름까지만 맞는 말이었어요. 미향이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시험 문제집 한 번 ..
-서정우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이 분실되었습니다. 배달 드론의 신호가 끊긴 것으로 보아 오작동으로 추정됩니다. 동일 제품이 자동으로 재주문되었습니다. 추가 비용은 일절 발생하지 않습니다. 배달에 2일이 소모될 예정입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정우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고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가 주문한 물건은 유기농 채소와 닭고기였다. 다른 물건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이틀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먹을 것이 똑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신용카드 기한이 사흘 전에 만료되고, 술을 잔뜩 마셔 하루를 그냥 보낸 탓에 뒤늦게 연장하고 보니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부랴부랴 주문했는데 이제는 배달 드론마저 행방불명이라니.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이틀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정용은 무작정 국도 갓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는, 그러나 보름이 가까워진 달과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은 벚꽃 때문에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이따금 바람이 한차례 불어올 때마다 어린 나비의 날개 같은 벚꽃이 살아 움직이듯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녔다. “더러워서, 진짜….” 정용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벚나무와 야산에 가려 물류창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면….’ 걸어서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용의 마음이 약해진 건 그 거리 때문이었다. 잠깐 수치스럽고, 잠깐 고개를 숙이면, 일당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몇십 킬로미터를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몇십 킬로미터라니, 그게 무슨 편의점에 새로 ..
이불빨래를 했다. 봄기운이 확연하여. 봄을 맞는 우리의 자세, 소지. 이번 봄엔 유난히 묵은 빨래를 모조리 다 꺼내 빨아 널고 싶어진다. 따스한 기온으로 은근하게 밀려든 봄이 아니라, 저 밑바닥부터 들썩이며 솟구쳐 나온 봄이어서 그럴까? 봄은 도적처럼 당도한다더니, 도처의 도적 떼들이 한꺼번에 봄을 몰고 온 느낌이다. 이불을 널고 또다시 세탁기를 돌리고 겨울옷을 집어넣고 얇은 옷들을 꺼내 걸다 보니,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웠었던가? 그것이 지난해였던가? 언젠가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겨울이 있었는데.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겨울은 대부분 추웠던 걸로 뭉뚱그려진다. 그래도 봄은 왔고 묵은 빨래를 했으니 이제 내 몸의 묵은 때도 벗어야지. 소지의 마지..
진만은 생일날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진만이 보거라. 엄마다. 네 생일인데 전화만 달랑 하기 미안해서 몇 자 적어 보낸다. 네가 군 생활할 땐 그래도 엄마랑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좋은 건지 잘 몰랐단다. 그 시절엔 엄마도 지금보단 젊었으니까. 타지에서 미역국이라도 제대로 끓여 먹었는지 모르겠구나. 엄마가 가서 챙겨주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식당일도 그렇고, 내 무릎도 그렇고, 도통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구나. 무심한 엄마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내 아들 진만아. 네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스물일곱 해가 지났구나. 엄마는 말랑말랑했던 네 손과 발을 씻기던 날들을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단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고 병치레도 잦아서 엄마 속..
인공지능 ‘사관’은 보고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의 얼굴 표정을 분석해 보았다. 평균적인 감정 상태는 안도 60퍼센트, 기쁨 56퍼센트, 슬픔 5퍼센트, 무관심 20퍼센트였다. 네 사람은 사관이 정리한 결과를 두고 여섯 시간에 걸쳐 토의한 다음 10퍼센트가량 더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넷 중 세 사람이 회의실을 나갔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인 이수현만이 회의실에 남았다. 그는 ‘사관’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관은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뉴스와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변별성 있는 항목으로 정리해 빅데이터에서 스몰 뷰를 생성하는 게 사관의 임무였다. 하지만 사관은 사람들이 스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