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시청 앞은 태극기를 든 노인들로 가득 찼다. 연단에 오른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부당하게 탄핵됐고, 국정농단은 조작된 사건이며, 언론이 거짓 선동했다고 되풀이했다. 국정농단이 아니라 ‘고영태와 그 일당의 금품사기 사건’이라고 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사기 피해자라는 것이다. 국회·검찰·언론은 깨부숴야 할 탄핵 3적으로 불렸다. 대형 스피커에서 울리는 ‘탄핵기각’ ‘대한민국 만세’ 구호가 찬바람에 섞여 귓전을 때렸다. ‘계엄령뿐, 군대여 일어나라’는 팻말을 목에 건 노인이 보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버스 앞 유리엔 ‘박사모 대구본부 12호차’ ‘박사모 경기 평택지회’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물어봤다. 왜 나왔느냐고. “촛불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 한다” “민주노총, 전교조가 나라를 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탄핵 정국,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이 사회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자주 접하는 단어는 ‘여성혐오’ ‘표현의 자유’ ‘검열’ 등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른 그림 ‘더러운 잠’이나 DJ DOC의 ‘수취인 분명’도 비슷한 논란 구조를 가졌다. ‘여성혐오 표현’이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검열 아니냐?’는 반응이 그것이다. 이런 논란 구조와 논의 방식은 ‘표현의 자유’와 ‘성평등’이라는 가치가 마치 공존 불가능한 이항대립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리다는 결론을 요구한다. 여성혐오라는 문제제기를 곧바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연결한다.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다. 여성들의 문제제기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려서 그른 것은 삭제..
‘국정농단 의혹’을 규명하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종전 11차례 실시된 특검과는 달랐다. 특검 및 특검보와 파견검사들은 한 몸이 되어 팀플레이를 했다. 주말과 설 연휴를 반납하고 거침없이 달려왔다. 혐의가 있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소환했고, 구속사유가 있는 피의자에 대해서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증거가 있는 곳은 여지없이 압수수색을 감행했다. 특검이 출범한 이후 구속자는 11명에 이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삼성 사이의 뇌물거래에서 ‘거간꾼’ 노릇을 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5명, 비선진료 의혹의 실마리를 풀어줄 박채윤 와이제이콥스메디칼 대표, 이화여대 입학·학사비리에 연루된 김경숙 전 학장 등 4명을 ..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제는 일정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이유로 특검 조사를 거부하더니 어제는 ‘국정 공백은 국회의 탄핵안 가결이 원인이고, 특검을 수용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발언까지 했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는 법인데 이제 주권자와 전면전을 선포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5000만명이 시위를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던 김종필 전 총리의 예언이 불행하게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손범규 변호사는 CBS 라디오 에 나와 “자기들(국회)이 탄핵을 해서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키고 국정 마비를 일으켰다. 제대로 된 증거와 확실한 혐의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을 야당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탄핵부터 감행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혼란이 박 대통령의 비리와 헌법 위반 때문이라는 것..
“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번 경제성 분석 결과를 확신합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경인운하 사업에 대해 비용 대비 편익(B/C) 분석이 기준점인 1을 넘는다고 설명하던 한 국책기관의 연구원이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같은 분석에서 1을 밑돌던 사업이 단번에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둔갑했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끝에 나온 답이었다. 한반도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MB 정부 출범에 토건관료들은 경인운하를 다시 들고 나왔고, 사업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국책연구기관들을 압박했다. 이전에도 정부는 B/C 결과가 1에 못미치자, 평가항목을 수정해 재분석을 요구했고, 그래도 경제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용역비 지급을 미루기까지 했다. ‘학자적 양심’과 불도저 같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에 2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국정농단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박근혜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꼭짓점에 두고 수백만 공직자가 연계된 위계적 피라미드 형태의 이 체제는 놀랍게도 아직 가동 중이다. 청와대가 법원의 영장을 받은 특검의 압수수색을 거부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검을 거부한 청와대가 택배차량 출입을 버젓이 허용하고, 수석 및 장관들과 독대하지 않는 대통령이 말 중개상을 단독 접견한 것은 이 체제가 연출한 부조리극의 실체다. 이들이 시민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를 낙동강 전선 삼아 농성하고 있는 것도 이 체제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야만적인 반이민 행정명령을 막은 것은 신선해 보인다.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은 행정명령 변호 거부로, 시애..
5·18민주화운동이 다시 우리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정권의 입맛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고 은폐돼 심지어는 북한군 투입설까지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1980년 5월의 진실이 하나둘씩 미국의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시민들을 향한 헬리콥터에서의 기총소사가 사실로 밝혀졌다. 1980년 5월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그리고 비록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된 역사도 5월의 희생 위에서 맺어진 열매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극도로 어수선한 시국에서 5월의 민주주의와 역사성을 키우고 발전시켜야 할 5·18기념재단이 정작 5월의 가치를 훼손하고 ‘민..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 법이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다른 거짓말을 더 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악순환에 빠졌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씨를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박 대통령은 지난 3일 헌법재판소에 낸 ‘소추 사유에 대한 피청구인의 입장’이라는 의견서에서 “피청구인(박 대통령)은 최순실에 대해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고 그녀가 여러 기업을 경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이라고 적었다.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 등이 최씨에게 속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40년 지기인 최씨를 작년까지 평범한 가정주부로 알고 있었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어이가 없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재단 설립과 모금에 대한 세부지시를 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