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전윤호(1964~) 시인은 ‘서울에서 20년’이란 시에서 아파트를 무덤에 비유했다. 무덤과 무덤이 마주 보고 있어 서로 불편하고, “당신의 눈 속엔 관이 안치”돼 있다고 했다. 하긴 ‘영끌’해 아파트를 샀는데, 금리마저 치솟고 있으니 “우리는 이미 반쯤 죽”은 게 맞다. 이 시에서도 ..
서울 정동에 있는 한 커피전문점은 오후 8시까지만 한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알바(아르바이트생)를 못 구하기 때문이란다. 광화문에 있는 이름난 식당은 오후 9시까지만 한다. 이곳은 셰프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두 곳 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일할 사람이 없단다. 심야에 택시 잡기 어려운 이유를 물어보니 밤에 일할 젊은 택시기사가 없다고 한다. 소규모 건축사 사무실 중에는 최근 SNS를 하는 곳이 많은데, 영업 때문이 아니라 직원 채용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7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경쟁률은 1979년 이후 4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잘나간다는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도 다를 바 없다. 쓸 만한 IT 전문가를 뽑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태풍 힌남노로 ..
동기부여 강사는 자신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임을 부단히 강조하더니 급기야 일찍 일어나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당당히 펼친다. 피식 웃음이 났다. 20년 넘게 새벽 3~4시에 기상 중인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찍 일어난다는 거 하나다. 무엇을 실천했다면, 그건 늦잠을 잔들 낮잠을 잔들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에 급급해지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 자체를 무작정 ‘좋고, 대단하고, 바람직한’ 사람들의 특징과 연결한 후 반대편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논리를 이어간다. 자동차를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의 특징은, 자동차를 아끼는 거다. 세차를 자주 하는 사람의 특징은, 세차를 자주 하는 거다..
화물연대 총파업 11일째인 4일 시멘트 업체가 모여있는 인천 중구 서해대로 가변 주차장에서 화물연대 차량의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일본의 혐한(嫌韓)이 어떤 건지는 영화 를 보면 감이 잡한다. 재일한국인 주인공이 일본인 여학생과 사귀다가 ‘한국인’임을 털어놓자 여학생은 선을 긋는다. “한국인은 피가 더럽대. 아빠가 가까이하면 안 된댔어.” 영화 에서 박 사장이 운전사로 고용한 기택에게선 정체 모를 냄새가 난다. 박 사장은 아내에게 말한다.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 혐오는 꺼림칙한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어떤 대상이 몸 안으로 들어와 자기를 더럽힐지 모른다는 느낌과 이어진다. 차별에는 이성이 개입하지만 혐오는 감각적이다. 뭔지 알려고도 하지 않..
영화 의 한 장면. 2020년 개봉한 영화 은 거리에 컴퓨터 학원과 영어 학원이 넘쳐나던, 이른바 ‘국제화 시대’였던 1990년대 중반(1995년)의 이야기다. 어느 날 회사가 “3개월 안에 토익 600점 이상을 받으면 고졸 사원도 대리로 승진시켜준다”는 공고를 내자 입사 8년차 동기인 주인공 여성 직원 셋이 모여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실제 그 시절 뉴스에는 ‘토익에 울고 웃는 직장인 세태’가 많이 나왔다. “토익 성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회사가 속속 늘어나면서 점수가 좋은 사원들은 승진과 급여 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반면 외국어가 짧은 사원들은 직장 내에서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무렵 대기업들이 토익 성적을 승진의 필수조건으로 삼고 직급별 마지노선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550점을..
왜 국가는 직업계고 현장학습제도를 포기 못할까. 문제가 많다면 개선의지는 있는지 모르겠다. 청소년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고 있는데도 말이다. 일터에서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차별 및 부당대우에도 적절한 권리구제 수단도 없다. 현장실습생의 신분은 학생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노동자와 유사한 일을 수행한다. 그렇다 보니 학생이 일을 하는지 일하는 학생인지 구분도 힘들 정도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은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 그리고 일반고 직업반 학생이 참여한다. 직업교육이 청소년의 학습권보다 강조되면서 피해가 적지 않다. 인문교육 미흡, 진학 결정의 정보 부족, 노동권·건강권 침해 등이 언급된다. 2011년 A자동차 공장의 실습생 뇌출혈부터 2021년 여수 요트업체 실습생 사망사건까지. 지난 10년 동안 실..
월드컵은 국가대항전이다. 국가나 집단에 대한 유대감은 누구나 있는 성향이다. 소속감은 의도적으로 동원되었을 때 문제가 된다. 월드컵을 중계하는 영상은 국기, 전통의상, 민족 정체성 상징물을 자주 비춘다.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자, ‘승부와 경쟁’을 자극하기 위해 기획된 배치이다. 월드컵에서 국가 간 대결 때보다는 인간애의 공통성을 발견할 때 더 깊이 감동한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약소국가를 응원하는 진정 어린 마음에서 1954년의 한국 축구대표팀을 만난다. 축구를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증명해내는 이변의 주역들에게서는 1966년 런던 월드컵의 북한 대표팀 모습이 그려진다. 국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의 대표선수들이 자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려는 투혼에서 2002년 한국..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지난달 30일 미국 보스턴을 방문했다. 왕세자 부부는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본인이 설립한 조직인 어스샷 상(Earthshot Prize)을 주기 위해서 미국을 찾은 것이다. 왕실이 최근 몇 년 동안 채택한 대의명분인 이 상은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나, 어찌 되었든 기후 문제에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구태여 영국에서 미국까지 와서 시상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올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문샷(Moonshot) 60주년이 되는 해이며, 보스턴은 미국 혁명의 요람이자 케네디 가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어스샷이라는 상의 이름은 케네디 대통령의 “문샷” 이니셔티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문샷’은 ‘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