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의 클래식방송. 어쩌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는 어느 사연을 진행자가 상냥하게 소개한다. 이에 한 청취자가 득달같이 한 말씀을 보탠다. “어떤 집이든 뚜껑 열면 다 끓고 있어요. 비등점만 조금 다를 뿐이죠.” 이 정도의 멘트라면 세계문학전집을 두루 꿰뚫는 경지가 아닐까. 자주 막히는 짜증의 길에서 혈로 뚫듯 오늘은 뚜껑에 관해 생각해 본다. 굳게 닫힌 세상의 뚜껑을 열겠다는 듯 도로는 팽팽 돌아가는 바퀴들로 가득 찼다. 예전 술을 즐길 때 아침에 뜻밖의 뚜껑을 호주머니에서 발견하기도 하였다. 심심한 손이 지압용으로 챙겼던가 보다. 그때 소주병 뚜껑은 왕관처럼 생겼으나 이젠 손으로 돌려 딸 수 있다. 어느 날엔 자루 달린 두레박 같은 뚜껑을 작정하고 하나 챙겼다. 더러 붓글씨라..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란 작품이 있다. 그림을 보면,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운 채 한 사내(이중섭)가 신명나게 황소를 끌고 있다. 목적지는 따스한 남녘. 달구지에 올라탄 부인과 두 아들도 한껏 즐거운 표정이다. 이중섭은 1954년 이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이 작품의 밑그림과 편지를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부쳤다. 가족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서귀포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이듬해 이중섭은 가난 등으로 인해 부인과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이 그림은 그래서 밝고 경쾌한 듯하지만 슬프고 아련하다. 이중섭 미술은 이렇게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중섭 부부에게는 실례되는 얘기지만, 그들의 이별이 있었기에 이중섭의 절절한 미술이 태어날 수 있..
(48) 정동 옛 법조 단지 1971년 대법원, 2021년 대법원 터.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1988년 발표된 이문세의 히트곡 ‘광화문 연가’는 제목에 ‘광화문’이 들어 있으나, 그 가사에서 연인들이 걷는 곳은 광화문이 아니라 ‘덕수궁 돌담길’과 언덕 밑 ‘정동길’이다. 두 사진은 지금도 연인들이 데이트코스로 많이 찾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이 만나는 조그만 사거리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것이다. 사거리를 둘러싸고 동북쪽에는 덕수궁, 서북쪽에는 미국대사관저, 서쪽에는 정동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1971년 사진에서 벽돌로 만든 육중한 문 뒤로, 나무에 가려 반쯤 보이는 오른쪽의 갈색 건물이 대법원 청사이며, 옥상에 높은 철탑이 있는 건물은 법원과 검찰이 나누어 쓰고 있었다. 즉 이 일대가 각급 법원과 ..
미국과 중국에서 변곡점이 될 수도 있었던 정치 일정이 일단 일단락되었다. 중국에서는 제20차 공산당 대회가 개최되었고, 미국에서는 중간선거가 있었다. 모두 일반 전문가들의 예측을 벗어난 결과들이 나왔다. 시진핑의 3연임은 일반적으로 예측하였으나, 이토록 권력을 집중할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하원에서 겨우 승리하였고, 상원에서는 여전히 민주당이 주도하게 되었다. 국제정치로 가면 그 예측은 더더욱 어려운 영역이 된다. 국내정치 변수는 물론이고, 통제할 수 없는 국제적 변수는 더 많아져 전문가의 분석이나 예측은 종종 빗나간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 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이 2019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서 주장했듯이 국..
한국 축구국가대표 선수들이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하루 앞둔 1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알 에글라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도하 | 권도현 기자 ‘적토마’ 고정운, ‘황새’ 황선홍, ‘왼발의 달인’ 하석주의 후반전 연속 골로 한국 축구가 북한에 3-0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선수들은 비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겼어도 ‘탈락’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모두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대반전이 일어났다. 선수들이 갑자기 얼싸안고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관중석의 한국 응원단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날 3경기가 동시에 열린 1993년 10월28일,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일이다. ..
“아, 정말 밝다.”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밤늦게 일이 있어 번화가에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저 말이 튀어나왔다.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밝기였다. 밤하늘에 달이 떠 있지 않았더라면, 밤이라는 자명한 사실마저 의심했을 것이다. “심지어 낮보다 더 밝은 것 같아.” 인공조명 사이를 거닐며 친구가 말했다. 그는 빛에 민감해서 잠자리에 들 때면 암막 커튼을 친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밤에도 너무 밝거든.” 비슷한 시기, 운명처럼 (시공사, 2021)를 읽게 되었다. 저자인 아네테 크롭베네슈는 빛 공해의 원인에서 출발해 그것이 인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 ‘밤에도 밝으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무수한 인공조명 때..
2016~2017년 ‘촛불항쟁’ 때 반블랙리스트 운동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은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를 꾸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검열과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을 조사했다. 그 결과 블랙리스트로 직간접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이 무려 8931명, 단체는 342개로 집계됐다. 마음을 크게 다친 문화예술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단지 일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가 아니라 정권이 ‘좌파 척결’ 따위를 명분으로 거의 전 장르에 걸친 문화예술계에 개입하여 자율성을 갖는 문화예술계를 인위적으로 바꾸고, 또 이런 작용을 통해 전체 국민에 대해 극우 이데올로기를 선전·유포하려던 ‘국가범죄’였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책동 같은 사안과도 ..
수많은 부정적 사건과 일화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를 말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명박산성’이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중순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막기 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했던 컨테이너박스 바리케이드를 일컫는다. 시위대가 오르는 것을 막는다며 컨테이너 표면에 칠한 윤활유는 미끈미끈, 뺀질거리는 이명박 이미지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용산 대통령실 청사 1층 로비에 가림막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명박산성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사 1층 현관에서 기자들과 진행하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하면서 취한 조치였다. 가림막으로 인해 로비에서 출입구 쪽 시야가 차단됐고, 기자들은 윤 대통령이나 참모들의 출입을 파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