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허수경(1964~) 이 봄에 파릇한 풀들과 새잎이 가볍게 천천히 흔들린다. 땅 위에 공중에 떠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바람도 살랑살랑 더불어 부드럽게 불어오고 불어간다. 또 어딘가를 떠돌며 가려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와서 가는 봄처럼 시인은 까딱거리며, 휘파람을 날리며, 건들거리며 봄을 산다고 말한다. 이 세계와 접면..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김경주(1976~) 새 떼가 퍼드덕대며 날아오른다. 대야에 물을 떠 발을 담그고 발과 종아리를 찬물로 씻을 때의 소리를 내면서. (이 이미지의 연결은 참으로 멋지다.) 찰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새 떼가 날아올라 날아간다. 내 몸과 찔레꽃과 능선 위로 날아간다. 구름을 지나가고 사라진다. 골짜기에서 생겨난 구름도 둥둥 떠서 간다. 새 떼는 날아가서 아주 사라지고, 새 떼가 날아갔다는 움직임의 흔적만 남았다. 그 흔적은 낙엽처..
네 감은 눈 위에 꽃잎이 내려앉으면 네 눈 속에 꽃이 피어난다. 네 감은 눈 위에 햇살이 내리면 네 눈 속에 단풍나무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네 감은 눈 위에 나비가 앉으면 네 눈동자는 꽃술이 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을까. 먼 항해에서 돌아온 배의 노처럼 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쉬고 있다. 가끔씩 배가 출렁이는지 넌 가끔 두 주먹을 꼭 쥐기도 한다. 네 감은 눈 속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하얀 자작나무숲을 한없이 헤매고 있을 거야. 지친 발걸음이 네 눈동자 위에 찍힌다. 네가 눈을 뜨면 내 눈은 까맣게 감기고 말 거야.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신철규(1980~) 데칼코마니는 하나의 무늬를 종이 같은 것에 찍어서 다른 표면에 눌렀다 뗌으로써 무늬를 ..
도화 피면 간다고 전해라 그대에게 당도하기엔 아직 멀고 추운 사랑의 온도 이곳은 여전히 바람 불고 말들은 지쳤다 허물어진 집터 사람들이 떠난 난롯가엔 몇알의 소금만 흩어져 있다 추억을 봉쇄한 자작나무 문 밖에서 몇잎씩 날리고 있을 눈발들 도화 이파리 눈발처럼 날리거든 간다고 전해라 추운 사랑의 온도 저 너머 사랑이 뿌리처럼 젖어 있는 곳 사랑의 온도 꽃으로 피어오르는 그곳으로 간다고 전해라 리산(1966~) 복숭아꽃 피는 때에 오겠다고 한다. 말들이 끄는 녹색마차를 타고 사랑이 꽃으로 피는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당신은 “추운 사랑의 온도”가 지배하는 얼어붙은 땅에 있고, 난롯가에서 온기를 함께 나누던 사람들도 유랑민처럼 흩어졌고, 눈발은 날리고 있으니, 봄이 돌아와 복숭아꽃이 마치 수줍어..
나는 점이 많다. 별명이 점박이다. 나는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나에겐 까만 마침표가 많다. 복잡한 게 아니라 풍부하게 산다. 문장을 다듬듯 알뜰살뜰 산다. 밤하늘처럼 초롱초롱 추억의 문장이 빛난다. 당신이 주어일수록 더 반짝거린다. 이정록(1964~) 칠성무당벌레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몸은 짧은 달걀 모양이고 몸 전체가 됫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라고 설명을 멋지게 해놓았다. 진딧물을 잡아먹고 사는 익충이라는 풀이와 함께. 내 어릴 적 놀던 뒷동산같이 생긴, 언덕같이 생긴 칠성무당벌레.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꼼짝을 않고 죽은 척을 하던 칠성무당벌레. 붉은색 딱지날개에 7개의 검은 점무늬가 있다. 시인은 이 점박이 칠성무당벌레의 생김이 단조롭거나 간단하지 않고 문양과 그것의 멋..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저녁의 오래된 기술 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장이 차갑게 깨져도 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 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 신용목(1974~) 이 시를 읽으니 밤은 하나의 건축된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둠이라는, 꼭 같은 크기의 벽돌 한장 한장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건물로 이해된다. 밤이라는 구조물에서 한장의 벽돌을 누군가 빼가지만, 그 자리에는 슬픔이라는 벽돌이 정확한 크기로 그 결여를 메운다. 모든 대상은 우리가 감각하는 내용보다 훨씬 입체적일지도 모른다. 가령, 신용목 시인이 시 ‘그림자 섬’에서 “빗방울에도 얼굴..
꿈속에서 아버지가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사라졌다 실눈을 뜨고 잠에서 겨우 달아났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사과 깎는 소리 발을 길게 끌며 향기가 둥글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박연준(1980~) 혼백(魂魄)이 와서 제사에 바친 음식을 받아서 먹는 것을 흠향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는 아버지의 넋이 꿈을 꾸는 어렴풋한 동안에 넌지시 다녀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느닷없이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하신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시인은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묻는다. 그럼 남은 식구들은 뭘 먹고 사느냐고. 아버지 아니면 누가 생계를 책임지느냐고.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사라져간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아버지는 부..
어머니는 감자를 깎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감자를 깎아 항아리에 담근 어머니 앙금을 내려 떡을 빚으면 떡을 빚으면 대관령 호랑이도 내려온다고 떡을 먹지 않는 호랑이도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감자를 깎는다 감자꽃빛 새벽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치성 올려 내 안에 앙금을 내리고 있다 내 안에 별빛을 내리고 있다 -윤후명(1946~) 어머니들은 감자를 깎는다. 어머니들은 감자를 삶아 그릇에 담아낸다. 감자를 갈아 그 앙금과 건더기로 반죽을 해서 쫄깃쫄깃한 감자떡을 쪄서 내놓으신다. 감자를 깎는 일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배워온 일. 흰색 또는 자줏빛의 소박한 듯 고운 감자꽃이 피고, 감자를 캐는 날이면 뽀얀 분이 잘 오른 토실토실한 감자들이 흙냄새와 함께 비탈진 밭에 가득하여 먹고사는 일에 잠시 걱정을 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