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 김선우(1970~) 민달팽이는 껍데기집이 없는 달팽이다. 찬 이슬과 매서운 바람과 폭우와 거친 눈보라를 피할 곳이 따로 없다. 돌아갈 곳도 끊어버렸다. 지나온 길은 무너뜨렸다. 근심과 슬픔이 오면 온몸으로 맞이한다. 실컷 울고 가던 길 또 간다. 나아갈 길과 다가올 내일을 미리 헤아려 홀로 열어 나간다. 뿔처럼 단단한 의지를 세우고서. 오직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두고 갈 것이 없고, 지나온 시간을 모두 버렸으니 참 홀가분하다. 밀고 밀며 가는 ..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김언(1973~) 존재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이다. 바로 지금, 여기가 있을 뿐, 다른 더 좋은 시절은 없다. 지나간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말고, 아직 오..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 최승자(1952~) 누군가 문이나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때 떠오르는 시구가 있다. 자크 프레베르가 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네’에서 “누구세요/ 아무도 없는데/ 그건 단지/ 너 때문에/ 두근거리는/ 아주 거친 소리로 두근거리는/ 내 마음의 소리일 뿐”이라고 쓴 것이 그것이다. 참 멋지게 잘 썼다. 생겨난 모든 소리는 생생하다. 바깥에서 오는 소리이든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이든. 두드리는 소리는 깨우는 소리이다. 질문하는 소리요, 응답하라는 요구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삶..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김광규(1941~) 생각해보면 뒤에서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있다. 나는 원조를 받고, 나는 지지를 받는다. 반짝이는 별에게 밤의 하늘이, 캄캄한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는 것처럼 누군가 혹은 어떤 힘은 나의 배경이 되어준다. 험한 낭떠러지로 내몰리지 않도록 밑과 옆에서 내 존재의 근거가 되어준다. 기초로 받쳐 놓은 주춧돌처럼. 그러나 그 후원의 손은 스쳐가는 바람 같고, 움켜쥘 ..
한겨울 눈 오는 날 청계천 헌 책방엘 갔다 김종삼 특집 낡은 시 잡지 표지에 이름도 없는 내가 김수영 전봉건 김종문 신동문 김광림 시인과 함께 섞여 내다보고 있었다 움, 무우순, 무순(無順), 번외(番外)라고 금방 끼룩거렸다 성중천(性中天)이 거기 있었다 맨 꽁무니 기러기 한 마리여 그즈음 어느 겨울날 아리스 다방 골목길 과일 가게에서 김종삼 시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조심스럽게 싸들던 홍옥 한 알과 김하림 시인도 이 겨울 생각났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애 중인 그들이었다 -정진규(1939~2017) 시인은 눈 오는 날에 찍었던 옛 사진 두 장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낸다. 한 컷은 헌 책방에 들렀던 때이고, 또 한 컷은 과일 가게에 들렀던 때이다. 시인은 책방에 가서 본 잡지의 표지에 자신이 여러 시인들 속..
처마 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백석(1912~1996) 백석은 이 시를 스물일곱 살에 발표했다. 숲처럼 짙푸르고 무성한 나이에 썼다. 얼굴에 혈기가 도는 나이에 썼지만, 이 시에는 겨울이 한가득 들어 있다. 명태는 함경도의 특산물. 처마 끝에 명태를 매달아 말리는 것을 시인은 본다. 몸의 등이 길고, 조금 마른 명태를 보고 시인은 명태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한다. 초췌하고 핼쑥한 자신의 모습이 명태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꼬리지느러미에 얼음이 붙은 명태와 가슴에 고드름이 달린 자신을 같..
-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 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 산 산 - 신석정(1907∼1974) 신석정 시인은 이 시를 1953년 1월에 발표했다. 언제 보아도 산(山)은 또렷하게 솟아올라 있다. 하늘에 별이 하나둘 돋아나듯, 산은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볼록하게 쑥 돌올하게 솟아 있다. 산은 굳세고 위엄스러운 기개로 섰다. 시인은 그 산의 높이를 정신의 높이로 읽는다. 산은 고결하고 신성한 정신의 높이로 섰다. 뿐만 아니라 산은 그 품에 생명을 화목하게 거느린다. 골짜기와 산등선에는 순한 눈망울의 산..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 정호승(1950~ ) 한번 박힌 곳에서 일생 동안 버티고 견디다가 구부러지면 본래의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못. 평생 육중한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고 견디는 일도 힘들지만, 녹슬고 구부러지는 ..